그러나 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2월 29일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든 수십만 군중들.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되었으나 경찰이 물대포와 고무총탄으로 강제진압에 나서자 곧바로 물리적 충돌이 이어졌다. 이날 대규모 시위로 두 번째 임시대통령 로드리게스 사아가 각료들과 함께 사임했다.

지난 12월 21일 극심한 경제난과 그에 이은 수십만 노동자 빈민들의 궐기로 델라루아 대통령을 하야시킨 아르헨티나.

그러나 물러간 대통령 후임자로 의회에서 지명된 임시 대통령들이 사태수습조차 하지 못하자 분노한 민중들의 거침없는 분출이 이어져 지난 2주 동안 무려 4명의 임시대통령을 갈아치웠다. 한때 IMF로부터 ‘아르헨 모델’이란 칭송까지 받았던 이 나라가 파산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도대체 IMF와 신자유주의는 이곳에 무슨 짓을 해놓았기에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을까.

신자유주의 교과서대로 경제정책 집행

1989년부터 99년까지 10년을 통치한 페론당 메넴 행정부, 그리고 99년부터 지난해 말 사임하기 전까지 집권한 개혁당 델라루아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교과서’였다. 80년대 엄청난 외채 앞에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던 아르헨티나는 IMF가 시키는대로 국영기업 민영화와 해외매각을 비롯한 해외자본 유치정책을 폈다. 닥치는대로 국영기업과 알짜기업을 초국적 자본에게 팔아치워서 달러를 만들고 그 돈으로 외채상환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메넴 행정부가 1989년부터 추진한 국영기업 해외매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항공사, 통신업체, 은행은 물론 TV채널과 라디오방송국까지 매각했다. 기업을 팔아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로와 석유채굴권이 매각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주민등록증 발급사업까지 독일기업에 넘겨버렸다. 국민 세금을 거둬들이는 국세청 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매각하려 했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코메디다.

메넴 행정부 집권 10년 동안 아르헨티나 전체 공기업의 무려 94%가 민영화 또는 해외매각되었지만, 외채는 오히려 850억달러가 늘어났다. 국영기업을 인수한 초국적 자본은 전화료와 전기료, 도로통행료를 자기 마음대로 올려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그 수익은 아르헨티나에 재투자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안전한 금고’ 속으로 빼돌려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부는 물가통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공공요금 규제수단마저 빼앗겼으며 거의 모든 정부 기능이 외국기업이나 금융기관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국영기업의 새주인이 된 외국자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영합리화’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아예 정부가 미리 대량 정리해고로 구조조정을 한 뒤 해외자본에 팔아치우는 사례도 많았다. 해외자본이 유치되면 일자리가 늘 것이라는 정부의 선전은 거짓말이었다.

연이은 초긴축정책에 민중생존권 파탄

페론당 메넴 행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99년 등장한 델라루아 행정부는 IMF가 자금지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재정긴축정책’을 폈다.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고 재정지출을 줄여 남는 돈으로 빚을 갚으라는 것이다. 재정긴축은 공공부문 지출 삭감을 의미했고 델라루아는 연금과 의료보험기관까지 긴축대상에 포함시켰다. 교사,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어졌지만 정부는 그때마다 공공지출을 더욱 줄이는 초긴축정책을 내놓았다.

2001년 한해동안 공공부문 노동자와 연금생활자들의 임금과 연금은 13% 삭감되었고 삭감된 임금마저 현금이 아니라 국채로 지급되었다. 델라루아는 이렇게 집권 2년 동안 무려 9차례 재정긴축을 단행했다. 그러나 부유층이나 대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정책은 단 한번도 없었다. 고통분담으로 경제를 살리자는 말은 애초부터 부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노동자 빈민

폭발의 기운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달 19일 델라루아 행정부가 은행 예금인출한도를 한달 1,000달러로 제한한 조치였다. 이 조치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쪽은 예금을 가진 자가 아니라 정반대로 전혀 예금을 갖지 못한 임시직,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전기공, 배관공, 청소잡역부 등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이들에게 자본가들은 은행인출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일당과 주급을 주지 않은 것이다!

한달 1,000 달러는 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국영기업 해외매각으로 엄청나게 오른 전기세, 전화세조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결국 먹을 것이 없는 이들은 대형 할인점과 외국 대기업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체인점 앞에 줄지어 앉아 구걸에 나섰다. 그러나 대형 슈퍼마켓은 사설 경비대를 고용하여 폭력까지 행사했다.

대형 슈퍼마켓에 대한 공격과 약탈이 시작되었고, 대통령궁 앞에 위치한 마요 광장에 연일 수십만이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델라루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고무총탄 물대포로 무장한 진압경찰이었다. 지방에서는 실탄을 장전한 경찰도 배치되었다. “일자리와 빵을 달라”며 정권퇴진을 외치는 시위대와 진압경찰의 충돌은 끝내 27명의 시위대 사망과 600여명의 부상(정부발표수치)이라는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델라루아는 경찰 공식집계로 시위대가 20명째 사망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사임결정을 내렸다. 그의 사임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환호했으나 그의 뒤를 이은 후임자들은 “1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사탕발림만 할줄 알았지 또다시 재정긴축을 하겠다는 발표가 나오고 은행인출제한이 풀리지 않자 민중들은 다시 거리에 나섰다. 22일 첫 임시대통령 라몬 푸에르타가 24일 로드리게스 사아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사아 임시대통령은 29일 수십만 대중이 의회를 둘러싸며 시위를 벌이자 사임했으며, 그 자리를 대체한 에두아르도 카마뇨는 이틀만인 1월 1일 4번째 임시대통령인 두알데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지난 20년간 겉만 다른 페론당과 개혁당이 정권을 주고받으며 신자유주의를 추진해 왔던 역사, 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은 단 열흘만에 대통령을 4번 갈아치우며 신자유주의 포기 선언을 받아냈다.

신자유주의는 재앙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다!

델라루아 행정부 도밍고 카발로 경제장관이 사임하던 12월 20일,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아르헨티나 주식시장 지수가 전날보다 17.48% 폭등했다. 고정환율제가 폐지되면 페소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에, 망해가는 이 나라에서 마지막 단물을 뽑아먹으려는 투기꾼들이 모조리 주식시장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렇다. 주식시장은 그런 곳이었다. 수십만명이 굶주림 때문에 빵을 달라며 목숨을 걸고 정권 퇴진을 외치며 싸우던 그 순간에도, 가진 자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불릴 수 있을까를 셈하며 주식투자에 여념이 없었다.

정부는 IMF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해외매각과 긴축정책을 폈지만 결국 희생자는 노동자와 연금생활자 등 빈곤층이었다.반대로 해외자본과 부자들은 지난달에만 자그마치 20억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그렇다. IMF는 노동자 희생 위에 자본가와 부자들 배 불려주는 단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난 1일 취임한 4번째 임시대통령 에두아르도 두알데는 “자유시장경제 정책으로 지금 한푼의 페소화도 남지 않았다”며 “닳아빠진 경제모델을 버리고 부의 분배와 시장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라”는 신자유주의 교리대로 따랐더니 쪽박만 차게 되었기에, 신자유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정책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선언이 그대로 실행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분노한 노동자 빈민의 분출이 그로 하여금 이런 선언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연말에 시작된 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은 신자유주의가 이들로부터 빼앗아간 것을 모두 되찾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오늘도 일자리와 빵을 보장하라며 거리에 나선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세계화? 신자유주의? 아르헨티나를 보라. 이곳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끝이 어디인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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