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를 자유롭게 나누고 공유하는 2002년을 위하여!
나는 '전자 민주주의'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도대체가 민주주의가 기술에 의해 도래한다는 설정 자체가 어느 '공상과학소설'보다도 공상적이다. 아니, '공상과학소설'은 체제의 지배와 헛된 인간의 욕심으로 자멸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실로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백혈병 치료약 글리벡이 드디어 도래했어도 독점 기업 노바티스의 소유욕과 지배력으로 인하여 멀쩡히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전자 민주주의라는 말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역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즉 이 믿음은 '전자'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자 '민주주의'에 대한 것인 게다.
2001년에는 어느 해보다도 인류의 위대한 전자 미디어에 대한 이 양가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정권은 김우중을 잡기 보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먼저 잡기로 결정하고 맨몸으로 농성 중이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살인적으로 두들겨 팼다. 그러나 이 사건은, 주류 언론 어느 누구도 취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되었다. 노동자들 스스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고 인터넷을 통해 배포했기 때문이다. 피가 튀는 그 동영상은 이 사건을 전국에, 전세계에 생생하게 고발했다. 1990년대 중반에 사파티스타 투쟁이 인터넷으로 번지고, 1997년 총파업 투쟁이 인터넷으로 밀려들었던 것처럼, 인터넷은 여전히 민중의 무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권력과 자본 또한 인터넷을 이대로 두지 않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이 노동자들의 인터넷 방송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것은 차라리 소박한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총공세는 가히 위력적이었다. 어느새 인터넷은 음란, 범죄의 온상으로 둔갑했다.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칭송받던 익명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불온, 유해, 명예훼손, 저작권 등 다양한 위축적 기제들이 본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던 한해였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보수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청소년 보호'가 미디어 통제의 본격적인 명분으로 등장하였다. 즉 갈수록 학교와 떨어지고 시장으로 내몰려 성과 노동 관계에서 착취받는 청소년들에 대하여 신보수주의가 질서회복과 통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미 성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위험한 성관계를 갖고 미혼모로, 낙태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에게 "그저 애들은 이런거 보아서는 안된다, 성관계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되며 동성애에 대해 알아서는 안된다"는 무능한 호령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을 진정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공공영역은 갈수록 쇠락하고 있다. 즉 지금 '청소년 보호'의 명분은 오로지 미디어를 통제하기 위한 용도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 때문에 아이들이 유해한 내용에 노출되고 원조 교제를 하고 자살하고 살인한다고 악을 쓴다. 왜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원조 교제를 하고 자살하고 살인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그들은 결코 던지지 않는다. 여기서 명분과 기능을 모두 갖춘 인터넷내용등급제는 그들이 고안해낸 최고의 발명품이다.
인터넷에서 아래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렇게 다양한 명분으로 위축되고 있는 반면, 상품의 영역은 갈수록 확장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인터넷의 정보는 '그냥 정보'와 고급의 상업 정보로 계층화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갈수록 확산될 것이다. 또한 부가가치 디지털상품으로 부상한 개인정보가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광범위하게 수집되고 통합되면서 개인들의 커뮤니케이션과 활동은 세밀하게 통제·제어되고 감시와 통제 권력이 증대되고 있다. 지적재산권은 이용자들이 공정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이용하는 것(fair use)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자본의 이해에 따라 강화되고 있으며 어느 무엇 하나도 이제 함부로 나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뉴라운드의 출범과 더불어 TRIPs 협정의 전세계적 관철로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런 경향 속에서 본격화한 것이, 이를테면 실명화의 흐름이다. 실명화는 인터넷의 익명이 범죄와 무책임을 부추긴다는 담론의 유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 일탈자이고 범죄자이므로 '그 어느땐가를 대비하여' 모두가 실명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주장이다. 실명화로 청소년 범죄가 줄고 온갖 '야만적인' 인터넷 범죄가 사라질까? 무엇보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투명해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익명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은 단지 담론적 수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주류적' 기술의 실물적인 흐름이 뒷받침되면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정부나 언론의 홈페이지, 그리고 대형 상업적 서비스 등 인터넷의 '주류'가 스스로 '실명화'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대한 수많은 수입 모델이 줄줄이 실패하는 가운데 개인정보의 수집 및 판매와 마케팅화가 몇 안되는 유력한 사업 모델로 부각되면서 인터넷 기업들은 기를 쓰고 실명 회원 정보를 수집했다. 물론 온 국민에게 고유한 주민등록번호를 부과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주민등록번호를 기반으로 한 실명 정보의 수집이 매우 용이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인터넷은 특별히 위험할 정도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숨어서 완전 범죄를 꿈꾸는 일이 생각만큼은 간단치 않다는 사실 말이다. 서버를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인터넷은 애초에 너무나도 투명하고 추적이 용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별히 설정을 변경하지 않는 이상 인터넷의 모든 행위는 아이피 주소로 남는다. 아이피 주소를 알면 누구라도 그것이 '동대문구에 있는 인터넷 천국이라는 PC방'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을 추적할 수 있다. 경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지금 그 글을 올린 사람이 PC방의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알 수 있다 - 지난해부터 경찰은 각 PC방의 아이피 주소와 맥 주소를 관할 파출소에 등록하게 했었기 때문이다. 익명에 대한 조장된 두려움은 수사기관의 이메일 감청이 남발되고 있고 프라이버시 침해가 위험수위에 올랐다는 국회의 지적도 압도해 버렸다. '팩트'는 왜곡되었고 익명의 위험은 과대포장되었다.
무엇보다 이제 주류의 공간에서 인터넷은 쌍뱡향적 공간이라기 보다는 일방향적인 정보 제공과 출판의 공간으로, 과거의 관성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이제 인터넷의 쌍뱡향성은 결국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통신질서확립법'이니 '온라인디지털콘텐츠산업발전법'이니 '저작권법'이니 하는 그들만의 법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인터넷을 점유하려는 민중의 끊임없는 노력에 비즈니스모델 특허를 적용하고 소리바다를 불법화하면서 맞서고 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 민중이 먼저 쟁취한 아래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에 손놓고 당황했던 사태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민주주의처럼, 전자 민주주의도 기술이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물과 땀과 투쟁으로 오는 것이다. 2002년에는 인터넷에서 우리의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그리고 자유롭게 읽고 공유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보다 본격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위협하고 있는지를 보다 분명히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정보통신 인프라와 관련 정책들이 그 계급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싸움은 매우 질기고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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