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 들어 최초 가수용 입주.

지난 1월 19일 봉천 7-2 재개발 구역에서는 봉천3동 철대위 가수용 입주식이 가수용 앞마당에서 열렸다.[사진 copyleft 참세상뉴스 정용택]

김대중정권 들어 최초로 쟁취한 가수용 시설
지난 1월 19일 봉천 3동(봉천 7-2구역)에서는 조그만 잔치가 열렸다. 무려 3년여의 싸움끝에 쟁취한 가수용 입주식. 김대중 정부 들어 최초로 얻어낸 가수용이다. 이날 100여명의 학생과 봉천동 주민들이 모여 봉천 3동 철대위의 가수용 입주식을 환영해 주었다. 봉천 3동 가수용에는 안학만(위원장), 박순단(부녀부장), 김상초(조직부장) 세 사람이 살게 된다. 콘크리트와 적 벽돌로 쌓아 올린 조그만 2층집, 아래층에는 방 한 칸과 부엌, 화장실이 이층에는 방 두 칸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가수용 주변은 봉천 7-2구역 아파트 공사를 위한 4.5미터 높이의 담장이 둘러있고 거대한 크레인이 가수용 뒤쪽에서 위력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날 입주식은 노빈학 연대투쟁단, 서울대 총학생회, 애니메이션 노조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가수용 앞마당부터 봉천 고개 6차선 도로를 도는 길놀이로 시작해 간단한 집회와 돼지고기 파티로 마무리되었다.

10개월이나 늦어진 사연 있는 입주식
가수용 시설을 얻어낸 것은 지난 2001년 4월달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서야 가수용 입주식을 하게 되었다. 근 10개월이 지나서야 입주식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봉천3동 철거민들의 치열했던 싸움의 역사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연이다. 사연은 2000년 6월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6월9일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철거민들은 6.9사태라 할 만큼 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철거민들의 민주당사 점거 농성이다. 민주당 총재실 안에 들어간 봉천동 조직부장 김상초씨와 상암동 이동수씨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각오하였다고 한다. 경찰 특공대까지 투입되어 점거농성은 진압되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자신의 이미지에 먹칠이 될까봐 농성투쟁을 쉬쉬하며 축소하였다고 한다. 민주당사 점거 농성으로 인해 김상초씨와 이동수씨는 실형을 받아야 했다. 봉천 3동 가수용 입주식이 늦어진 사연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현장과 감옥, 동시 투쟁
김상초씨는 감옥 안에서도 자본과 권력에 맞서 계속 싸웠다. 1년 6개월동안 여섯 번의 옥중 단식농성이 있었다. 옥살이를 하기 전 1년여의 철거 싸움 속에서 싸우지 않고서 이길 수 없음을 뼈 져리게 알았기 때문이다. 99년 11월18일 오함마와 도끼, 포크레인을 앞세운 용역깡패들이 동절기 강제철거를 하였다. 거기에 맞서 싸우다 현재 봉천3동 철대위 위원장인 안학만씨는 콩팥이 파열 되었고 나머지 주민 10여명도 심한 부상을 입었다. 당시 봉천 3동에 투입된 용역 회사는 '다원건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원동, 봉천6동 등지에서 악명을 떨쳤던 '적준'이라는 용역 회사였다. 김상초씨는 2000년 2월에도 화염병 사용 등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런 피 말리는 와중에 철대위 에서 짠 전술이 경찰들에게 계속 새 나갔다. 결국 서정철 전위원장이 프락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자본의 온갖 사악함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김상초씨는 당시의 프락치 사건에 대해 "부끄러운 역사"였다며 당시 프락치 였던 서정철 전위원장은 자본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토사구팽 되었다고 했다. "원래 철거 싸움은 이윤에 현혹되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떨어져나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민 팔아먹고 잘 살수가 없습니다. 자본가 놈들이 곱게 놔둘 것 같습니까?" 프락치로 밝혀 졌던 서정철 전 위원장은 '구상권 침해로 900만원의 벌금과 공무집행방해, 불로소득'등으로 결국 임대에서 쫓겨 나게 될 판에 놓였다고 한다.


[봉천 3동 김상초 조직부장]



김상초 씨가 구속된 후에도 남은 주민들은 강제철거에 맞서 싸우며 청와대 진격투쟁, 관악구청 앞 천막 농성 투쟁 돌입등을 벌이는 도중 납치와 온갖 폭행을 당해야 했다. 2001년 겨울의 구청 앞 싸움은 또 한번의 목숨을 거는 싸움이었다. 추운 겨울 구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할 때는 비닐 한 장치지 못하게 하고서는 구청직원들이 새벽에 농성장에 나와 죽었나 살았나 발로 툭툭 쳐보기도 했을 정도이다. 바깥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는 소릴 듣고 김상초 씨는 감옥 안에서 함께 목숨을 걸었다. 이때 김상초 씨는 "감옥안에서 울분을 삭히며 두 주먹으로 벽을 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25일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강제 급식을 시키려는 교도관에 맞서 몰래 모아둔 모래주머니와 못을 앞에 두고 "삼키고 죽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식 23일 째 되던 날 깨보니 병원에서 링겔을 맞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3일을 더 굶고 단식을 풀었다. 몇 일 있다가 승리의 소식이 들려 왔다. 그러나 김상초 씨는 "밖에서 들려온 승리소식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합의 공증을 들고 온 동지들을 보고 나서야 감옥 안에서의 싸움을 멈추었다. 이들의 싸움이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감옥 안에서는 죽기를 각오한 단식 농성을, 감옥 밖에서는 살인적인 추위 앞에서 벌인 노숙농성을 함께 믿으며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젠 투쟁 중독증에 걸려 버린 철거민

봉천3동 주민 김상초(34세)씨는 지난해 10월28일 진주교도소에서 민주당사 점거투쟁으로 인해 1년 6개월동안 복역하고 만기 출소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이젠 투쟁 중독증에 걸렸나봐요"라는 말로 대신한다. 가수용 단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기 전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젠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자본가 놈들에게 굴복하고 질까봐 두렵습니다" 라며 "악랄한 김대중 정권에 끝까지 양심을 지키며 싸워 나갈 것"이라 하였다.

예정된 입주식행사가 3시부터 였으나 2시부터 가수용 시설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관악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보고, 하던 말을 잇지 못한다. "저것들만 보면 분통이 터져서."라며 "얼쩡거리지 말라"고 쫓아낸다. 단지 입주식일 뿐인데도 꽤 많은 형사들이 행사준비과정을 보기 위해 조그만 골목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는 "이 투쟁이 나만의 투쟁이었다면 이렇게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이미 몇 번의 죽음을 넘나든 싸움을 했던 것이 "이제는 자본가 놈들에게 결코 무릅 꿇을 수 없다"는 삶의 원칙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도 "뉴스에 나가면 이 말은 꼭 넣어줘요" 라며 "우리 어머니가 올해는 꼭 장가가라고 했는데 이미 임대 아파트는 하나 마련했으니 이만하면 쓸만한 신랑감 아니냐"며 "결혼 좀 할 수 있게 광고 해 달라"는 장난기 있는 말을 했다.

봉천 3동 주민들은 이제 "나만을 위한 싸움은 싸움이 아니"라고 한다. "관악구청 앞에서 살인적인 추위 속에 그렇게 싸웠던 것은 가수용, 임대쟁취 이런 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 내 집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힘없다고 함부로 내동댕이치는 자본가들 앞에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안학만 철대위 위원장의 말은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질서재편에 맞서 싸우는 모든 민중들이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인 듯 싶다.

'2005년 주거스타일'이라는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 사진 간판이 가수용 주택 옆 아파트 공사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간판 속의 화려한 인테리어는 봉천 3동 주민들의 피를 먹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 스산한 담벼락의 간판보다는 초라해 보이지만 100여명의 학생과 주민이 어우러진 가수용 주택 앞마당의 풍경이 훨씬 정겨운 것은 투쟁으로 얻어낸 값진 성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수용 건물 뒤쪽, 봉천 7-2지구 재건축 아파트 현장의 대형 크레인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그 아래의 7-2지구 철대위 깃발은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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