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전쟁, 국제주의가 직면한 또 하나의 시험장
최전승민(PICIS 활동가)
지난 3월 6일, 부시 미 대통령은 미국의 철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최고 30%까지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주류 언론은 물론, 특히 유럽연합 등 미국에게 철강을 수출해오던 국가들은 미국의 이와 같은 '보호주의'를 비난하고 나섰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 시대, 자유무역 시대에 보호주의가 왠말인가? 더군다나 여태까지 줄곧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청하며 WTO 등 다자간 무역 체제에서 그토록 날뛰던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 정부들은 발끈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조치로 영국 커러스 사의 5%를 비롯해 유럽 철강 생산자들은 평균 2.6%의 매출 손실을 보게 될 것으로 예상되며, 미국 철강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철강 가격 상승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WTO에 미국을 제소하면서 '전쟁'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다른 정부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 진보진영은 미국
의 관세 조치를 규탄한 소수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침묵하고 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있는 자들 간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것
이 틀린 말은 아니다. 저들 간의 싸움이긴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제가 이렇게 단
순하지만 않다. 일단, 관세 부과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철강회사 사장들과 철강노조
가 나란히 앉아 관세를 환영한다는, 유럽의 경우 규탄한다는 입장을 공동으로 표명
하는 장면이 석연치 않다. 그 간 북반구 노조들이 보였던 '보호주의적' 경향을 극복
해 나가고 있다는 기대가 컸는데, 이번 사건으로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
닌가. '세계화 반대', '자유무역 반대'라는 국제 사회운동 진영의 구호가 지금만큼
'뻘쭘'해진 적도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딜레마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반대한다
고 해서 미국의 보호주의에 찬성표를 던져줄 수 없지 않는가? (물론 요즘 전사회적
으로 '반미' 감정이 뜨거워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유무역의 룰
을 어긴다며 미국을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국의 의도와 문제의 본질
철강 수입에 대한 높은 관세를 부과한 미국의 표면적 의도는 간단하다. '세이프가
드(safeguard)' 조치는 국가가 급격한 수입 증대로 자국 상품의 가격 하락과 산업의
위기를 경험할 때 최대 3년까지 수입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 장치로,
WTO에서 보장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미국 철강 회사들이 도산해 법정관리에 들어
가 있고, 전통 제조업인 철강산업을 보호함으로써 미끄러지고 있는 미국 경제를 다
시 활성화시켜보겠다는 것이다. 유럽은 미국의 철강 수입이 지난 해 동안 오히려 줄
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미국은 유럽의 불공평한 보조금 정책으로 자국 철강 산업
이 위기에 처해있고, 더불어 강한 달러 정책으로 자국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
락했다고 반박하면서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것이다.
물론 조금 덜 표면적이고 약간 복잡한 이유도 있다. 대대적인 정리해고와 역사적
인 투쟁을 통해 쟁취한 각종 연금과 보험 혜택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자 철강
노동자들은 지난 12월부터 워싱턴에서 천막 농성을 하면서 무려 40%의 수입관세를
요구했다.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연금과 수당을 정부로서는 도저히 부담할 수 없고,
하지만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끌어안을 필요를 느낀 부시는 수입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관세를 제시한 것이
다. 사실 노동자들이 원하던 것은 수입관세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용불안정
(노동자들 절대 다수가 비정규직이다)과 임금 하락이었는데, '관세 부과'라는 한계적
인 요구를 하는 바람에 결국 부시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사·정 간 '화합'을 다지고 원래 민주당이
강세인 철강산업계의 표를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문제, 즉 미국의 수입 관세가 과연 미국 경제, 나아가 신음하고 있는 세
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길게 논의할 바가 아니
지만, 한 가지 지적하자면 철강 가격 상승으로 오히려 자동차나 무기 등, 기타 산업
이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경험
하고 있는 불황이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구조적인 경제 불황이라는 것이
며, 탈규제화 등 금융세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의 철간 산
업은 자동화, 설비 감축, 하청 및 노동유연화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단행해왔다. 또
한 강한 달러 정책이 수입에 대한 상대적 경쟁력 하락을 가져왔다고 미국은 주장하
고 이것이 틀린 주장은 아닌데, 자본 부족으로 제조업이 불황에 시달리는 동안 금융
시장은 오히려 자본이 남아돌아 엄청난 팽창을 거듭했다. 과대평가된 달러로 미국은
그 동안 해외 금융자본을 끌어 들여 금융시장을 키웠던 것이다. 금융세계화 체제 하
에서 항상 그렇듯이, 대부분의 투기성 금융자본인 해외직접투자는 제조업의 생산설
비 확충 등에 사용되지 않고 '돈 넣고 돈 먹는' 데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투기성 금융자본의 집중은 미국, 나아가 세계 경제 전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계획은 문제의 핵심
을 외면하고 오히려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철강 산업 쇠퇴의 본질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문제, 즉 이번 결
정 속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적 역관계를 이해하는 데의 핵심이기도 하다. 수입 관세
가 도태되어가고 있는 철강산업을 장기적으로 되살릴 수 없을뿐더러, 철강노동자들
의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도 매우 미심쩍다. 왜냐하
면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는 오히려 금융세계화로 인한 자본주의 위기의 구조
적 결과이자 철강산업이 그 동안 단행한 노동유연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지, 본질
적으로 '과도한 수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과도한 수입을 제어하고 가
격 하락을 방지함으로써 추락하고 있는 이윤율을 방어하려는 것은 자본가의 이해이
지,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아니다. 철강노조는 핵심을 잘못 짚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주의를 자극해 고용불안정의 책임을 '해외'로 돌리려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
섭되어 문제의 본질로부터 눈이 멀어지고 있다. 게다가 철강 가격 인상은 곧 기타
금속산업 또는 중공업의 원료 가격 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 전체에 임
금 하락과 정리해고 바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미국의 철강노조는 간과하고 있
다.
'자유냐 보호냐'를 넘어...
문제는 수입 관세와 그것이 갖는 계급관리 효과가 미국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북반구와 남반구 사회운동 간 분열과 국제주의의 약화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은 해외(저가 수입, 덤핑,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
등)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관료화된) AFL-CIO 등 미국 노조들
이 중국에 대한 영구적 내국민대우(PNTR) 지위 부여와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
고 WTO에 사회조항 편입을 찬성하는 등, 노조 및 사회운동의 '보호주의'와 우경화
로 이미 여러 번 나타났다.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가 저임금의 중국 및 제3세
계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제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럽 등 기타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민족주의를 자극해 자국 자
본가들을 보호하는 한편 남·북반구 노동자들을 분열시킬 수 있었다. 이번 관세 조
치와 이에 뒤이은 '보복'의 행렬, 그리고 각각의 입장에 대한 노조들의 동일시는 미
국 노동자와 유럽 및 아시아 노동자들 간 분열을 조장해 국제주의를 심히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경향은 북반구 및 남반구 운동 간 연대와 금융세계화에 대한
급진적 대응을 요구하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상당한 질곡으로 작용했다. 그 후 미
국 노조들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국제주의적 시각을 그나
마 키워나갔다 그런데, 다시금 부시의 철강산업 관세 부과에 찬성함으로써 극복되어
가던 우경화의 길에 다시 들어선다는 것은 반신자유주의 운동 전체의 입장에서 큰
우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전세계적인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를 직접적
으로 제기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속
에서 부시의 의도를 정치적으로 폭로하고 미국의 수입 관세 부과나 유럽 및 한국
등의 보복 모두 노동자들에게 절대 대안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신자유주의 노동유
연화 반대'를 통해 국제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지금 노동 및 사회운동들에게 부여된
매우 긴급한 과제이다.
한편, 수입관세 조치를 금융세계화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이번 사
건과 관련해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자유무역이냐 보호무역
이냐'라는 이분법적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미국 등 선진국 정부와 초국적 자본이 그토록 부르짖던 '자유무역'의 진실을
만천하에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유무역 반대'라는 구호가 현
상황에서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은 엄밀하게 운동진영의 '오류'는 아니다. 애초에
'자유무역 반대'는 '보호무역'의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제 무역 질
서가 초국적 자본과 선진국의 이해에 복무하고 있을 뿐 제3세계의 종속과 억압을
심화시키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지배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자본가와 투자자에게만 자유로운 무역)의 논리를 그들의 언어를
이용해 상징적으로 반대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 수입관세 조치 이전에도 이미 '세
계화 반대'와 더불어 '자유무역 반대'라는 구호가 부적절하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상
징성도 약화되고 있다는 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게 상징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저들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이 사실
상 자유무역이 아님을 폭로하면서 그 동안 당연시해왔던 '자유무역 반대'라는 구호
를 실천적 수준에서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무엇을 보호하자
는 것인가?
미국의 철강산업 관세 부과와 이것이 가져올 여파는 단순한 '저들만의 싸움'이 아
니며 진보진영은 팔짱끼고 침묵해도 될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반대', '자본주의 반대'를 걸고 그 동안 급성장한 국제연대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이번 조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
보진영은 미국의 철강산업 수입관세 부과를 금융세계화의 모순에 대한 임시방편적
대응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국제연대 운동이 다시금 분열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고,
'자유무역 반대'라는 구호를 '자유무역 대 보호무역'이라는 이분법으로부터 끄집어내
보다 구체화하고 금융세계화에 대한 명확한 반대와 함께 배치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9.11 사태, WTO 뉴라운드 출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등 우여곡절을 효과적으로 이
겨내고 올해 초 세계사회포럼과 최근 바르셀로나 유럽연합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다시 한 번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성과를 수호하고 국제주의
를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