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요즘 민주노동당은 한국 정치를 가르는 시금석, 리트머스지, 경계선이 되어 있다. '안정 보수' 이회창과 '개혁 보수' 이인제와 '급진 좌경' 노무현이, 민주노동당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한판 씨름 중이기 때문이다. 힘 없는 민주노동당으로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너무 찜찜하다. 보수 정객들이 민주노동당을 들먹일 때마다 자신들의 무식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는 현실이 비참하고, 그들의 주장이란 것이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멀리 있음을 한사코 강변하는 한통속이니, 너무도 척박한 한국 정치가 서글프다.
이념과 정책 논쟁이 지역이니 인물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기준보다 월등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근래의 논쟁이 이념과 정책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가 하는 것인데, 보수 정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신문 지면을 달구는 이야기들은 중학교 사회교과서의 이념 구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회창과 이인제는 노무현더러 "너, 사회주의지"라고 묻고, 노무현은 호들갑을 떨며 "아닌데요"라고 답한다. "너, 예전에 이렇게 말했잖아"라고 되물으면, 노무현은 "그 때는 철이 없었어요"라고 변명한다.
세 후보의 노선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를 오가는 어떤 정책을 두고 갈라 서는가? 아니다. 이인제, 이회창이 반대하고, 노무현이 번복한 '재벌해체'는 극우 군인 맥아더가 이미 실천한 것이고, '노동자 소유 경영 참가'는 대한민국 헌법과 현행법에 의해 제한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세 사람 사이에 오가는 논쟁이란 것이 노선의 계급성, 그리고 개별 정책의 총합으로서의 이념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욕지거리에 불과할 뿐인 구래의 '색깔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상식적으로 이념·정책 논쟁은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적어도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정도의 정치지형이 형성돼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모두 신자유주의와 재벌과 미국을 섬기고 있고, 국회에서 세입 1%와 정부예산 0.1%를 놓고 드잡이 하는 수준이니, 그들의 차이라는 것은 현미경 아래에서나 분별 가능하다. 그나마 정권이 바뀌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차이에 불과하다.
민주노동당이 나서야 하겠지만, 정작 그 상대가 되야 하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에는 지조 있는 이념이나 진짜 정책이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한국정책학회는 그렇게 평가한다.
"(보수정당의) 대부분의 공약 내용들이 선심성 공약들로서 지엽적인 정책 목표들만 단순히 나열시켜 놓았을 뿐, 그러한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수단이나 재원들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 9개 정당 가운데, 재정의 규모, 실현 시기 및 재원 조달 방안을 가장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다(『정견 정책 자료집 2000』)."
사실, 노무현의 노선은 유럽 기민당보다도 보수적이다. 그런 노선을 '좌경'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나 표 떨어질까봐 말 바꾸는 사람에게는 이념을 논할 자격이 없다. 중학교 교과서 정도는 이해하고, 제 노선을 용기 있게 고수하는 보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념 논쟁은 불가능하다.
[82호] 4.8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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