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
지난달 15일 서울 도심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전직 북파 공작원들이 열띤 시위를 벌여 국가를 상대로 "포섭 때 약속의 이행"-즉, 빼앗긴 청춘에 대한 보상-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왜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가. CIA 소속의 침투요원들이 백악관 근처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 것이나, 영국 MI(군 첩보기관) 특무요원들이 런던의 총리관저 앞에서 시위하는 광경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상상이 안되지 않는가.
그날 서울 광화문 앞에서 벌어진 일이 외국에서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이유가 한국인의 다혈질에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북파 공작원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그들에 대한 국가의 '대접'을 CIA나 MI의 요원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북파 공작원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일종의 '악덕 기업주'의 노릇을 해왔다. 그 결과로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없는 '특무간첩들의 항의시위'를 보게 된 것이다.
사지(死地)로 보낼 사람을 포섭할 때 '봉첩'(물색요원)이 금전적 보상과 제대 이후의 생활안정, 직업소개 등 약속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말하자면 주로 부랑자, 극빈층 출신의 '포섭대상'들에게 신분 향상, 계급사회의 중간계층쯤으로의 '파격적인' 계급적 지위이동을 미끼로 내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한국과 같은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는 '맨 밑'으로부터 '중간'으로의 '파격적인' 계급적 상향 이동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신분 향상시켜주겠다"는 약속에 속아넘어간 가난한 젊은이들을 기다린 것은 살인적인 훈련과 일상화된 인권 유린, 구타와 죽임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정보부대 교관들이 해상훈련 도중에 물에 빠진 요원들을 구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계급국가의 폭력기구인 군대에서는 최하층 출신의 병사가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소모품이었다.
부상치료 거절, 북파 잠입 중 사망자의 유가족에 대한 일체 책임 포기, 훈련 중 탈진 때의 살인적인 구타…. "그들에게 '인권'이 없었다"고 하기보다는, "피착취층의 젊은이들이 착취자들에게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비교하자면, 건설회사가 비정규직 인부에게 아무런 안전장치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비교를 계속하자면, 제대 이후에 정착금이든 직업소개든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유효기간이 지난 소모품'들을 거리에다 팽개친 것은, 일당 잡부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내보내주는 '불량 기업주'의 행동과 마찬가지다.
요구를 시도하는 전직 북파 공작원들에게 "죽이겠다", "전 가족 몰살하겠다"고 협박한 정보 기관의 행동도, 악덕기업 '구사대'들의 일상적인 추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
우리 대한 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특무부대에 입대한 북파 공작원들의 오판은 실로 컸다. 그들이 섬기려고 했던 '대한민국'의 실체는, '우리 나라'라기보다는 노동자 임금을 상습적으로 떼먹는 사기꾼 고용주였다.
"떼인 임금을 돌려달라"는 '머슴'들의 절규에 대해서, 고용주 측의 최고 대표인 김대중 대통령은 3월 19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폭력시위 등의 이런 치안상태가 계속된다면 경제회복에 치명타를 주고 월드컵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즉, 사기 행위를 저지른 '회사'의 최고 대표가 자신의 회사의 돈벌이("경제회복")와 "체면"(국제행사)을 우선으로 생각한 것이지 '머슴'들의 눈물과 절망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착취자들을 대표하는 '주류' 정객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계속 운영한다면, 피착취층(민중)에 대한 대접은 이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82호] 4.8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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