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호[비디오 골라보기-레이팅스톤]삶의 반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명인/영화평론가 proteur@empal.com
딸아이의 첫 성찬식 때 입힐 드레스 때문이었다. 실직한 밥이 몇푼의 돈이라도 얻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는 모습이 그렇게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말이다. 그냥 헌 드레스를 입혀도 될테고, 빌려준다는 사람의 신세를 잠깐 져도 될텐데 말이다. 고리대금업자의 빚까지 지고 있으면서도 언감생심 새 드레스라니...

훔친 양고기를 팔아도 보고, 막힌 하수구 뚫는 사람으로도 나서 보고 보수당원 집 잔디도 훔쳐낸다. 주위사람들은 혀를 차지만, 밥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드레스란 켄 로치에겐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딸아이에게 드레스를 사주는 것이 밥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자신에게는 없는 희망과 미래를 작고 깜찍한 딸아이의 모습을 통해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직자의 거리에는 마약과 술에 절어가는 아이들의 모습만 늘어간다. 어차피 신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이라 믿지는 않지만, 밥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실업률이 극에 달했던 93년 영국 맨체스터 지역 실직 노동자의 삶을 다룬 <레이닝 스톤>은 주인공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현실의 에너지를 찾아내던 사회주의파 감독 켄 로치의 영화 중에서도 어두운 편에 속한다.

평범한 밥의 삶이 출구도 구원도 없이 나락으로만 내몰리게 되는 상황은 보는 이의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누른다. 그러나 이 노장 감독은 은근한 유머로 삶의 반전을 마련해둔다.

<레이닝 스톤>에는 켄 로치의 영화관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억울한 밥의 사정이 영화적 유희를 위해 이용될 수도 있고, 폭력과 살인 장면을 통해 영화적 쾌감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드레스를 입고 싶어하는 딸과 드레스를 사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을 신파적으로 보여주며 정서를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는 늘 단호하다. 그는 거짓 환상과 거짓 희망을 버리게 하고 삶 본연의 눈높이로 영화를 이끈다. 그의 무미건조한 영화를 보며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삶의 투시법을 통해 영화가 삶을 다루는 자세에 관해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삶에 대한 욕심을 키운 노장의 진심이 또 한번 우리를 깨우친다.
[82호] 4.8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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