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좌우지간]도토리 키재기

진중권/<아웃사이더> 편집주간
소위 이념논쟁(?)이 한창이다. 중앙일보에서는 후보들 이념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놓고 그걸로 후보를 검증하자고 설치고 있다.

'좌파'라는 의미를 '친북'과 동일시하는 조선일보나 한나라당보다는 낫지만, 이걸 조사라고 내놓고 사설에서 "진보/보수로 검증하자"고 주장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다.

최근 색깔론이 버전업했다. 고전적 색깔론은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의 트레이드마크인 국가주의적 색깔론이었다. 이것이 먹히지 않자 새로운 형태의 색깔론이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 중앙일보에서 마련한 자유지상주의적 버전의 색깔론이 그것이다.

진보/보수 이념논쟁의 중심은 역시 '사회복지'와 '환경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극좌"를 달린다는 노무현의 입장은 정작 실망스러울 정도다.

가령 '사회복지' 문제에 관해서 노무현의 진보성은 한나라당의 이부영, 박근혜, 이상희 후보와 같게 나타났고, '환경문제'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후보가 '성장과 환경을 함께 추구하되 양자가 충돌할 경우 환경에 역점을 둔다'는 데에 대답했다.

외교안보에 관한 입장은 어떠한가? 여기서도 노무현 후보의 진보성은 실망스럽게도 이부영과 이회창을 합해놓은 정도로 나타났다.

그런 노무현이 왜 졸지에 "극좌"로 둔갑한 걸까? 조사 항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호주제, 국보법, 사형제, 양심적 병역거부, 인터넷 등급제처럼 이념을 초월한 보편적 인권에 관한 항목이 들어가 있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호주제, 국보법, 사형제, 등급제는 폐지되어야 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는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 인권의 문제다. 아울러 정간법, 평준화, 기여입학제 등 이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항목도 들어가 있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 번 조사에는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관한 의견도 물을 법하다.

이건 가짜 스펙트럼이다. 0부터 10까지 우익의 스페트럼만 있을 뿐, 0에서 -10까지 왼쪽은 통째로 생략되어 있다. 이념을 검증하자며 왜 정작 민주노동당은 빼놓은 것일까?

이념 없는 이념 논쟁. 혁신 없는 보혁구도. 그걸 전문용어로 '도토리 키재기'라 부른다. 발돋움하는 노무현 도토리, 뾰로통한 이회창 도토리. 싸우지 마세요. 둘 다 커요. 졸라 커요.
[83호] 4.15 ~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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