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일 (진보네트워크 사무국장)
지난 해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별다른 증거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무자비한 공습을 자행했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본격적으로 병력이 투입되기 전에 행해진 미군의 공습은 아프간의 주요 군사 시설 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이러한 방식의 전쟁은 미군 병력의 큰 손실없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끌었다.
만일 미국이 남한과 전쟁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프간과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또 하나의 작전이 수행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한국의 인터넷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율 세계 1위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미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사회 영역에 깊숙하게 침투해있다. 따라서, 인터넷이 마비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정지된다는 것이며, 이는 핵폭탄보다 더욱 큰 위력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의 인터넷을 마비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터넷 루트 서버(Root Server)에서 .kr 네임서버를 표시하는 한 줄을 삭제하면 된다. 그러면, .kr로 끝나는 도메인 네임을 가진 홈페이지에는 접근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은 손쉽게 이것을 할 수 있다. 루트서버에 대한 권한(authority)을 미국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 사례는 다소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미국의 파워는 인터넷에서도 일상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의 고향은 미국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미국넷'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터넷'이라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미 인터넷이 지구적인 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고 했을 때, 인터넷의 운영에 관한 미국의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98년 말에 인터넷 주소자원(도메인 네임, IP 주소 등)의 관리를 위해 ICANN(The 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이 설립되었지만, 인터넷 주소자원에 대한 미국의 지배는 여전하다. ICANN은 캘리포니아 주법의 통제를 받는 미국의 비영리 회사이며, 그래서 1년에 3~4번 열리는 ICANN 정기 회의 중 1번(11월 정기회의)은 미국 LA에서 개최된다. edu, mil, 그리고 gov같은 일반 최상위 도메인은 com, net, org와 같이 전 세계에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만 등록할 수 있는 도메인이다.
ICANN이 결정한 7개의 최상위 도메인도 미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최종 확정된다. 참여가 '열려있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ICANN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의 기업 세력이다. '인터넷의 안정성'이라는 명목으로 인터넷 주소자원에 대한 운영 권한은 아직 ICANN에 완전히 이전되지 못한 상태일뿐더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ICANN의 일반 민주주의는 사실상의 '힘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ICANN을 둘러싼 역학관계를 '미국 지배'로만 얘기할 수는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업 지배'를 다른 측면에서의 주도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ICANN에서도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세계 질서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인터넷주소자원관리기구 ICANN의 최고 책임자인 스튜어트 린(Stuart Lynn)은 ICANN의 구조 개편안을 제안하였다. 그는 ICANN이 설립된 98년 말 이후, 지난 3년 동안 ICANN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필수적 단위의 참여 저조, 효율성에 비해 과도한 과정에의 집착, 부족한 재정 등을 문제점으로 짚었다. 그리고, 합의에 기반한 민간 자율 기구로부터 정부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개편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에는 이용자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이사(board)를 각 국 정부에서 선출된 이사 및 인사위원회에서 선출된 이사로 대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제안서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철학은 '효율성'의 강화이다. 그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효율성'이란 대의 앞에서, 민주주의란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다. '현실'을 인정하자며, 그는 '현실 권력'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 구조적으로 소외된 세력들이 들어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 듯 하다. 린의 제안서는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현실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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