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차 노동자들의 또다른 시작


퇴근길.
쓴 소주 한잔의 취기 때문일까? 부평구청 지하철역을 향하던 발걸음은 어느새 자연스레 정문옆 농성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산곡동 샤미나드피정의집에서의 농성을 정리한 후 정리해고조합원들의 복직을 향한 지속적인 또 다른 투쟁의 연장선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난로의 훈훈함이 얼굴을 확 밀치고 나와 술기운이 오른 두볼이 불그스레 달아올랐다. 오늘은 공기부와 프레스의 동지들이 농성을 하는 날이라 삼삼오오 모여 앉아 회의 아닌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동지들의 빛 그을린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다. 오랫동안 믿음직스럽게 함께 했던 일철이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며 연거푸 쓴 소주를 들이 마셔 댔다.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아무런 말이 없이 푸른 담배연기만을 자욱히 채우고 있었다. 벌써 1년이 넘은 정리해고조합원들의 복직투쟁은 대출과 퇴직금으로 하루하루를 어렵게 이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앞이 보이지 않는 복직투쟁 앞에서 무어라 모두가 말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지 한겨울의 냉기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부평 바닥에도 여지없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그 해는 왜이리 새하얀 눈이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온통 세상을 뒤덮어 버려 잡아먹을 기세였다. 그 새하얗게 뒤덮인 공장의 아스팔트를 가로질러 정신 없이 이 공장 저 공장을 돌아다녀 조합원들을 끌어 모았지만 집배원의 발걸음은 여지없이 1,750명의 정리해고통보서를 갈산동 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인천바닥을 분노와 울분의 도가니로 만들고야 말았다.

삼일천하라고 했던가. 울분이 가시기도 전해 공장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던 700여명의 조합원들과 가족대책위들이 투쟁의 대오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2월19일 6천여명의 폭력경찰들이 굴삭기로 담을 허물고 기습적으로 현장을 침탈하여 생존권의 몸부림마저도 하나, 둘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본과 정권의 합작품인 산곡동의 피바다사건인 4.10경찰병력의 무자비한 폭력만행은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구속과 수배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부평은 그야말로 계엄령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숙제들을 남긴 채 또 다른 희망의 봄을 맞이한다. 산곡동의 김일섭위원장과 김성갑수석부위원장 그리고 영원한 대자의 동료 김혁동지가 학익동으로 이감된 이후 노동조합은 지금 19차 특별 단체교섭을 집행 중에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문제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서 노동조합은 진통을 겪고 있다.

노동자가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존중받고, 우리의 아이들이 이 시대의 주인이라는 허울좋은 말뿐이 아닌 진정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금 그려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지금 눈처럼 새하얀 도화지를 다시금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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