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섭 jks@kdlpnews.org
1988년, 올림픽으로 기억되는 그해, 24명의 사람들이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도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었다.
5월은 특히 더 했다. 5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됐던 유진곤 옥중 후유증으로 운명, 9일 전남민청련 창설과 5. 3인천 항쟁을 주도한 신영일 운명, 13일 민족통일애국청년회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한 고정희 정신병원으로 연행 뒤 의문의 죽음, 15일 서울대 학생 조성만 "미국을 몰아내자"며 할복투신 자결, 18일 단국대 학생 최덕수 "광주를 잊지 말자"며 교내에서 분신, 24일 순천 현대교통 택시노동자 장용훈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분신.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박래전은 5월 중순,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고향집을 찾았다. 뜬금없는 막내의 방문에 시골의 부모는 기쁘기만 했다. 박래전의 형 박래군도 이때 잠시 시골에 내려와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늘 함께 있었던 형제
부모가 학생운동을 하는 막내를 늘 곁에 두고 싶어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둘째 아들 박래군이 연세대 국문과에 합격했을 때, 부모는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에서 인물났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박래군은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위장취업을 해 결국 구속까지 됐다. 부모는 막내아들은 둘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말썽 많던 둘째와 막내가 부모를 도와 참외밭을 갈구며 땀을 흘렸다. 5월의 석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이날이 마지막으로 막내를 보는 날이 될 줄은 부모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형인 박래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열흘 뒤인 6월 4일, 스물 다섯 박래전(당시 숭실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은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박래군(41)씨를 만나러 돈암동에 위치한 인권운동연구소에 찾아가는 길에 박래전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서를 읽었다.
"천하의 몹쓸 불효자 막내가 드립니다. 이제 두분의 곁을 떠나려 함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를 길러주신 두 분, 피와 살을 나누어주신, 저를 애지중지 길러주신 두 분, 두분께 분명 저는 몹쓸 불효자입니다…어머님, 강하게 사세요. 비록 자식은 떠나지만, 제가 원했던 세상을 보기까진 절대 눈감지 마세요. 아버님, 엄하셨지만 다정한 아버님, 건강하세요. 썩어들어가는 다리도 고치셔야죠. 절대로, 절대로 저의 죽음을 비관하지 마세요…절대로 목숨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어머님, 아버님, 모질게 먹은 마음이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아요. 어머님, 아버님 안녕히(6월 2일 불효자 막내 드림)."
박래군씨가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박씨는 '박래전 열사의 형'이라기 보다는 그 자신이 인권활동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운동권이었던 박씨는 동생이 분신하던 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약 20일전) 고정희의 영안실에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에 자취 집에 들어와서야 알았어요. 기가 막혔죠."
두 살 터울인 동생과는 어릴적부터 친구처럼 지냈다. 큰형이 있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았기 때문에 두 형제는 특별히 친했다. 동네 어른들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형제를 보고 "창자가 이어져 있다"고 말하곤 했다.
"동생은 저 때문에 운동하기가 순탄하지 않았어요. 제가 구속된 이후에 부모님은 동생을 강제로 휴학시키기도 했죠. 동생은 다혈질적인 경향이 있었어요. 차분하지 않고 수틀리면 들이 박는 성격었죠. 제가 차분하게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형은 형 밖에 모르냐고 반발하기도 했어요."
돈없으면 찾아왔던 동생
둘 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사는 곳도 달랐고 서로 바빴지만 한 달에 한 두 번은 서로 만났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동생이 돈 달라고 해서"였다. 노선이 달라 논쟁도 있었지만 동생이 배고프면 찾는 사람은 형이었던 모양이다.
"노동운동을 뼈를 묻겠다"던 박씨가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유가협 활동이 계기가 됐다.
"래전이가 죽던 해 10월에 의문사 가족들이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했어요. 저도 유가족이니까 방문을 했죠. 농성을 하는 걸 지켜보는데 실무자가 한명밖에 없었어요. 유가족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서 농성이 끝날 때까지만 함께 있기로 결정을 했죠. 그러다가 1백35일간 농성을 하게 됐어요. 결국 유가협 사무국을 만들고 사무국장이 됐죠."
93년까지 유가협 사무국장을 지낸 박씨는 94년부터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요즘 박씨는 또하나의 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씨는 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국장으로 잠정적으로 내정된 상태다.
"임기가 10월까진데 뭘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이제까지의 조사작업을 보완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유가협에는 의문사지회가 별도로 있다. 의문사지회의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신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그래서 그는 욕먹을 것을 감수하면서 조사과장에 응했을 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유가족의 슬픔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84호] 4.22 ~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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