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모에 가입했다는 말을 하는 시인들이 많다. 아직도 시인들이 무슨 정치냐고 말하는 시인들도 역시 많지만, 그런 비웃음을 가볍게 넘기고 과감히 노무현 지지를 밝히는 문인들의 모습을 보며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정치라고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동유럽에서 잇달아 공산체제가 무너지던 90년 초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에세이집 제목이 내걸린 서점 앞에서 그 제목의 느낌에 취해 더디 사려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섰던 기억이 있다. 하벨은 벨벳혁명이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부드러운 정권이양과정을 거쳐 프라하의 얼어붙었던 봄을 온갖 꽃이 만개하는 자유로운 여름으로 이끌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극작가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가슴속에는 다스릴 길 없는 이율배반적 감정이 끓어올랐다. 자기 문학이 말하는 바를 현실공간에서 실현해내는 지식인의 존재를 지근거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이상스런 느낌이었달까.
말을 다루는 예술가로서 문인들은 그 어느 분야의 담당자들보다 더 정치와 가까운 사이일 수밖에 없다. 독재와 폭압의 정치를 향해 앞장서서 거부와 반대의 목소리를 내어온 것이 문인들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너무나 당연히, 독재자들의 통치는 반대자들의 침묵이라는 무덤 위에서 지속적으로 언어를 왜곡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것은 특별한 용기가 아니라 문인이라는 역할에 아로새겨진 카인의 별이란 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 하벨의 경우가 나를 북받치게 한 건 독재가 끝난 그 자리에서 문학이 보여준 너무 다른 태도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정치사에도 저항문학의 강줄기는 부끄럽지 않게 도도하고 문인이면서 정치가였던 사람도 수로는 남들 못지않게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문인들은 대체로 내게 작품 속의 생과 현실공간에서 펼쳐지는 비루한 삶 사이에는 건너면 안 되는 강이 있다는 씁쓸한 체념을 안겨주었다. 단아하게 구축된 그들의 문학적 언어는 정치적 수사를 만들어내는 일 이외의 어떤 실제적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고, 삶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는 서로 소통불가능한 따로노는 국밥들이었다. 우리나라 문인들은 막상 생산이 요구되는 정치적 실천 앞에서는 너나 없이 머뭇대거나 아니면 문학을 벗어놓고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나쁜 정치'에 저항하는 것이 지나쳐서 '정치 자체'를 부도덕한 것으로 이미지화해버린 탓이다.
그러나 생산하는 정치에 기여하지 못하는 문학이 저항하는 정치에 기여한다는 게 참말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저항은 반드시 문학이 아니라도 한다. 인간존엄성이 무시당하고 모멸당할 때는 누구나 가장 치열한 자기 언어로 싸운다. 막상 거대억압이 사라지고 보다 섬세한 삶의 구조가 생성되어야 할 국면이 왔을 때, 저항을 위해 우리가 상상력의 힘으로 만들어낸 그, 아직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이 이제 정말로 열리려고 할 때, 그곳에 가야한다고 말만 하고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하는 게 문학과 정치의 분업일까?
하벨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격정은, 단순히 진짜 문학의 언어가 곧바로 정치의 언어로 전용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거나 문학이 생의 호사가 아니라 생의 기본인 나라 사람들에게 지니는 열등감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문학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직접, 구체적으로 행하는 문인을 발견한 데서 오는 놀라움, 오히려 당혹감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제 벨벳혁명 못지 않은 시민혁명의 세기가 열리고 있다. 인터넷을 타고 진행되는 이 혁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의 혁명이며, 그러므로 문학적 혁명이다. 문학인들이 구체적인 현장에 뛰어들어 자기의 문학적 비전을 현실에서 증명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았으면 한다.
노혜경(시인)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