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좌파' 논쟁에 대해 노르웨이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노자 교수의 의견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편집자주)
△ 현재 한국 보수정치권에서는 때아닌 '좌파'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당 내부에서 시작된 이 거짓 논쟁은 한나라당과 조선 등 언론들의 가세로 확대된 듯합니다. 이 논쟁을 바라보는 박선생님의 시각과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이인제씨와 이회창씨의 말(말도 안되는 발언들을 '말'이라고 부르기가 어렵지만)을 읽어가면서, 두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그 두 사람이 받은 교육의 한계로 '좌파'라는 용어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써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알면서도 유권자들의 무지와 '좌파'에 대한 냉전 시기의 콤플렉스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좌파'의 교과서적인 정의(시장 체제에 대한 회의적, 부정적 태도와 이를 보충하거나 대체시킬 신체제의 모색, 근로자 복지와 전인적 삶 향유에의 노력 집중 등)라도 제대로 알고 남을 속일 의도를 가지지 않으면, 노무현씨를 '좌파'로 부르고 논쟁을 시작했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 좌우 또는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잣대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좌파'의 변하지 않은 것은, 세계 체제의 억압적 현실과 인간의 소외, 물화에 대한 반성과 대안의 모색이 아닌가 싶습니다. '좌파'는 잉여 가치를 생산해내면서도 생산 경영, 정치, 진정한 의미의 문화로부터 소외를 당한 자들의 이해를 표방하고, '우파'는 잉여 가치 수취층의 이해를 표방합니다.
물론, '좌'도 '우'도 현실적으로 천차만별의 유형이 존재하고, '좌'-'우'의 차이 못지 않게 '극우'와 '온건 우파'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관료 체제(즉, 잉여 가치 수취 체제)의 출신이자 재벌(잉여 가치 생산, 수취를 관리하는 대형 집단)의 기부금을 대량으로 받는 정당의 정치인을 '좌파'로 부른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웃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 현단계 남한에서 좌우를 구분할 수 있는 주요한 잣대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실 수 있습니까. 자본주의 또는 시장이라는 '거대담론'과 연관된 것도 좋고 공기업 사기업화 등 주요 정책에 관련된 것도 좋습니다.
= 현재 한국의 '주류 정당'(한나라당, 민주당 등) 속에서 이렇다 할만한 '좌익적인'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노동의 요구에 대한 강력 대응, 맹목적인 외자 유치, 경제적 필요성이 전혀 검증되지 못한 '이념적인' 공기업 사유화 같은 정책을, 모든 '주류 정치인'(즉, 보수 정객)들이 다 일종의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들 사이에서 일종의 '정책적 일관성'이 보이기도 합니다.
즉, 김영삼 정권이 시작한 대량 해고 허용 정책을, 김대중 정권이 -IMF 사태를 이용해서- 완성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차이점이라면, 김대중이나 그 '계승자'로 최근에 부각되는 노무현은 일반적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를 훨씬 높은 수준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보법의 존속으로 봐서는, 일반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도입의 측면에서도 그들의 한계가 만만치 않습니다.
△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이념적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두 당의 차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까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한나라당을 대략적으로 '극우'나 '수구, 보수성이 심한 우파'로, 민주당(특히 노무현 쪽)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온건 우파'로 각각 정의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민주당의 정책 노선에서는, 그 실망스러운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군국주의적, 국가주의적인 극우적 정치, 사회적 형태들을 점차적으로 해체시키려는 의도가 보이기는 합니다. 극우주의의 와해는, 노동 진보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을 '좌익'으로 부를 수 없을 겁니다.
△ 내용 있는 또는 제대로 된 이념 논쟁을 벌이자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이 사회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주류 정치인'(부르주아 정객)들이 근로자 위주의 비시장적인 대안의 존재와 가치를 일단 인정할 줄 알아야 그러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이 근로 인구 40%를 국가가 고용하는 노르웨이나 기업 25∼30%를 국가가 소유하는 프랑스의 경험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까지 그들 쪽에서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민주노동당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여야 후보들에게 본격적인 이념 논쟁을 갖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좌파정당 또는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들의 가짜 색깔 논쟁으로 변질된 이념 논쟁에 어떤 태도와 접근법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지요.
= '좌파'의 본격적인 이념 -즉, 근로자와 그 전인적인, 소외되지 않은 삶 중심의 사회 건설-을 정정당당하게 내놓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독일처럼 노조 대표들이 회사 경영에 전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나라, 스칸디나비아처럼 비정규직으로서의 고용이 철저하게 제한되는 나라, 지금의 이태리처럼 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총파업해도 경찰과의 전투가 발생하지 않은 나라의 건설은, 궁극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 노무현 돌풍, 즉 흔히 말하는 '노풍'의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노풍'의 주역이라면, 역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의 이미지를 가진 '온건 보수' 노무현을 늘 모함하는 극우 신문(조선, 동아)의 권위를 무너뜨린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을 벗삼아 사는 30대 사무직의 정보세계는, 옛날의 텔레비전 시청자이자 <조선>, <동아>의 구독자의 정보 세계와 본격적으로 다릅니다.
인터넷에서는 얼마든지 '이질적인' -즉, 극우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른- 정보를 만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주장을 동시에 살피는 과정에서 자주적인 비판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열려 있는', '현대적인' 이미지는 바로 인터넷 시대 정치인의 최적 이미지이지요.
또 하나는, 노무현씨의 안티 지역주의적인 입장은 지역주의 타파의 물결을 잘 탄 겁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극우주의자들이 조작해 놓은 지역주의라는 허위의식이 무너져야 할 단계인데, 노무현이 그 바람을 아주 잘 탔습니다.
아직까지 극우주의적 프로파간다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많은 한국인들에게 '계급'이나 '사회민주주의'가 '과격 용어'로 들린다는 것은, 비뚤어진 권위주의 정권의 역사의 산물입니다.
'치료 방법'은, 역시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서 현재 한국 현실의 근본적인 모순점과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열심히 대중적으로 설명하고, 각종의 노동, 사회 운동들과(특히,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비정규직 운동, 반전평화 운동 등)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겁니다.
지금 많은 대학교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상당수 생기는 걸로 봐서는, 결코 '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한반도의 숙명적인 문제들(사회적 불평등, 각종의 종속성, 환경 파괴 등)을 궁극적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미래는 대안 세력의 것입니다.
△ 노풍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고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 여기에서는, 현실론과 이상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부르주아 정치인들 중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의 지향이 가장 강하게 있어 보이는 노무현이 집권한다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세력에게는 분명히 각종의 기회들을 제공하는 최선의 시나리오인 듯합니다.
반면에, 극우주의자 이회창의 집권은, 한반도에서의 긴장 강화, 군국주의의 강화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은, 노동 진보 운동의 자체적인 능력을 키워 대안적 정치적 세력으로서 주체적으로 국정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 이념 논쟁과 관련돼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덧붙여주시기 바랍니다.
= 진정한 좌파의 힘이 강화돼서 부르주아 정객들이 '좌파'라는 말을 '딱지'로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으면 합니다.
[ 85호] 4.29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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