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기자
"노무현은 좌파인가?" 요즘 유행하는 이따위 명제의 참·거짓을 섣불리 증명하려 들다가는 큰코다친다. 이 나라 정치판에서 모든 논쟁은 논리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엔 노무현이 소장파나 학구파일지언정 좌파는 아니라고 떠들어봤자 그들이 그렇게 '믿으면 그만'이다. 절만 개혁할 게 아니라 '중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미스터 리 눈에 "민주노동당도 하지 않는 급진적 주장을 하는" 이 자는 좌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당장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노무현이 좌파라,굽쇼?"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급진좌파 노무현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어이없이 중도개혁정당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니, 자고로 한국인이 진짜 눈뜨고 못보는 건 '좌파'가 아니라 '배아파'! 백주대낮에 좌파의 이름표를 강탈당한 억하심정을 달래주는 건, 그저 영화밖에 없으렷다. 이왕이면 아주 급진적이고 과격한 영화가 제격이다. 여기, <휴먼 네이처> 처럼.
남들은 기껏 가슴이나 봉긋이 솟아나는 사춘기 시절부터 온몸에 털이 솟기 시작한 라일라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기어코 행실 올바른 박사 나단을 사로잡을 정도로 이 모녀(毛女)의 가증스러운 문명화과정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자신을 원숭이라 굳게 믿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깊은 숲속에서 문명과 격리되어 성장한 원시 인간 퍼프가 등장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라일라는 원시인을 완벽하게 사회화 시키려는 나단의 실험 때문에 순수한 야성을 잃어가는 퍼프를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급기야 퍼프를 탈출시켜 야성을 재교육시킬 계획을 세우는 라일라. 물론, 나단이 가만히 앉아 있을리 없다.
얼마 전 그렇고 그런 코미디 영화인양 포장해 개봉한 <휴먼 네이처>가 좌파적인 영화라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분류에 대해 실눈을 뜨고 매서운 눈초리를 쏘아대는 사람들도 있을줄로 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분명 심히 불온하고도 혁명적인 내용으로 가득차있다(미끈하고 날렵한 곡선으로 빠져야 할 여자 속살이 무성한 털로 뒤덮인다는 설정부터가 불온하지 않은가!).
이름에서부터 공들여 만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미셀 공드리 감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좌파영화들처럼 "어느 인간이 더 진보적인가?"하는 퀴즈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아예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진보적인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민주노동당도 하지 않는(아니, 할 리 없는) 급진적 주장"인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역사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매너의 역사>라는 폼나는 저작을 통해 "인간 역사의 과정이 매너의 세련화과정인 동시에 본능적 충동의 억압과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적 있다. 온갖 제도과 금기를 얻는 대신 자연스런 삶의 매력을 잃어버린 것, 바로 이 것이 엘리아스가 눈치챘던 '문명화의 역설'이다.
그 말마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는 혁명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는 급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정작 일상에서는 맨날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먹고 싸고 놀 수 밖에 없는 요즘 세상.
당신이 진정한 좌파적 원숭이라면 '남들처럼' 득표력과 권력에 집착하기 보다는 '남다르게' 생명력과 상상력을 보듬어야 마땅할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독히 수구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만국의 털없는 원숭이에게 영화 <휴먼 네이처>는 촉구한다. 만국의 원숭이여 단결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품위요, 얻을 것은 자유니라.
[ 85호] 4.29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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