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섭 jks@kdlpnews.org
부부는 늘 자식에게 속았다. 운동권 자식을 둔 '죄'로 부부는 늘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 왔다.
서울대를 다니는 큰딸은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밤늦게까지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고 했다. 부부는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는 운동권인 큰딸이 경찰에 체포됐을 때야 딸의 늦은 귀가가 공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생 강민호도 85년, 한신대학교에 합격하며 대학생이 됐다. 그리고 운동권이 됐다. 누나처럼 그도 부모를 속였다.
86년, 건국대학교 점거농성 사건이 있던 날, 그의 집에는 제사가 있었다. 장남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 김혜수(67)씨가 그날을 회상한다.
"우리는 민호가 건국대에 있을 줄 몰랐죠. 민호가 누나한테만 얘길 했어요. 딸은 부침개를 부치다가 안절부절, 뉴스만 틀었어요. 며칠 뒤에 내 아들이 건국대에 있다는 걸 직감했죠."
부부는 진압이 있던 날, 새벽에 건국대로 달려갔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사이로 경찰의 방패에 찍힌 학생들의 피가 튀었고 몽둥이가 춤을 출 때마다 학생들이 쓰러져 갔다. 저기, 쓰러지는 학생들(당시 연행자 1천5백25명)속에 장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속된 아들이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운동권 자식'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다. 집나간 큰딸을 노동현장에서 찾아내 집안에 앉히고 장남은 늘 감시해야 했다.
19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개표사건이 발생했다. 아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부부는 구로구청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강영철(70)씨의 회상이다.
"벌써 경찰이 들어가 다 끌어냈어요. 아들을 찾을 길도 없어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죠. 경찰이 마구 때리면서 진압했다고 하니까 병원에도 가고…생업은 포기하고 자식을 찾아다녔죠."
어머니는 재판과정에서 장남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누구 앞에 나서질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어리광만 부리는 장남이었죠. 그런데 재판장에서 구호를 외치며 난 잘못한 게 없으니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겁니다. 난 아이고 애야 그러면 안돼, 판사님한테 그러면 안돼, 하고 울면서 속으로만 애를 태웠어요. 엄마는 벌벌 떨고 있는데 아들은 무서운 것이 없는지 '노태우 타도'만 외치는 거예요."
노량진 경찰서, 안양교도소, 안산경찰서, 영등포교도소, 태능경찰서, 성동구치소, 서울구치소, 마산교도소, 부부가 큰딸과 장남 때문에 다녔던 "팔자에도 없던 곳"이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장남은 1988년 가을이 짙어가는 10월, 특별사면으로 1년만에 석방됐다.
89년, 부부는 더 이상 경찰서, 구치소를 다니지 않았다. 부부도 '운동권 자식'에 대해 한시름 놓고 있었다. 90년 새해를 맞이하는 강민호의 글.
"나는 한평생 노동자로 개척하며 살아갈 것이다. 역사의 가장 진보적인 계급으로…오로지 앞만을 향해 전진할 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결의한다."
90년 3월, 강민호는 4학년 마지막 학기에 등록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취직할 친구의 신원보증을 서달라고 했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아버지가 거절하자 뜻이 통했던 누나에게 신원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3월 28일, 누나가 써 준 신원보증을 들고 그가 찾아간 곳은 안산의 한 공장이었다.
4월 4일, 1백 50여명이 주야 12시간 맞교대를 하는 공장에 취직한 그는 야간작업에 들어갔다. 강민호는 "오늘은 학교에 늦게 가도 된다"며 오전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고 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가며 '학교'에 가는 장남에게 손을 흔들었고 장남도 몇걸음 가다 다시 뒤를 돌아보며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밝았다.
강민호의 죽음은 참혹했다. 야간작업 도중 폐선을 매고 연신기 옆으로 난 통로를 지나가다 폐선이 회전하는 연신기에 휘말렸다. 강민호는 몸이 매고 있던 폐선과 함께 순식간에 연신기에 빨려 들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 노동자로 살겠다던 그는 취업한 지 7일만에, 스물네살의 나이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났다.
어머니는 벌써 너무 많이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격한 감정을 누르느라 애꿎은 리모콘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학교에 있어야 할 아들이 끔찍한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부의 심정을 묻지 않기로 한다.
신원보증을 서 줬던 큰딸, 작은딸, 형에게 빚진 것을 갚겠다며 운동권으로 뛰어들었다가 부모의 눈물로 운동을 접은 막내는 12년이 지났지만 먼저간 장남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 식구들은 민호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에요. 생각하면 너무 한이 맺혀 살 수가 없거든요. 결혼한 딸은 자기 자식과 함께 민호의 산소를 찾고 막내는 막내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산소에 가요. 기일이 되면 함께 가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부부가 가슴에 묻은 아들에 대해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곳은 유가협. 그래서 아버지는 유가협 총무를 맡으며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는 10여년간 집회에 다니느라 서울에 있는 대학은 다 가봤다. 집회장에서 공중전화를 붙잡고 "엄마, 오늘 나, 친구집에서 공부하고 갈께"라고 부모를 속이는 학생을 볼 때, 눈물은 왜 그렇게 흐르는지….
인터뷰를 끝내자 식사를 하고 가라며 기자를 붙잡는 어머니, "노사모와 취재약속을 해 놔서요, 노사모가 요즘 저희한테도 중요한 관심사라서…"라고 얼버무리자 민주노동당의 고민을 다 안다는 듯 기자의 어깨를 툭치며 "그래도 우리 집 아들, 딸들은 다 민주노동당 편이야,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울다가 웃으며 말한다.
현재 강민호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에 의해 명예회복은 받았지만 보상심의 위원회는 "김민호의 취업은 민주화 운동을 위한 취업이 아닌 생계를 위한 공장 취업"이라는 이유를 들어 보상은 받을 수 없다고 판결이 난 상태다.
[ 85호] 4.29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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