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순/편집위원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보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은 '발로 그려도 저만큼은 그리겠다'이리라. 이미 현대 미술 감상은 미술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특히 추상화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위의 이미지 세계를 벗어나 작가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존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표현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추상화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기피하는 미술사조이기도 했다. 소련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추상화는 전시는 물론이고 그리는 일조차 금기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주의국가에서 거의 적대시했던 추상회화가 러시아혁명의 세례를 받아 발전했다면 아이러니일까?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해 러시아 미술계는 미래파·큐비즘·구성주의·절대주의 등 이른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만개하며 예술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시기였다.
당시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이에 부응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예술적인 욕구와 실험이 분출했다.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가두는 우리들의 붓, 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라고 부르짖으며 혁명적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무엇보다도 추상회화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적극적인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사조에 관대했다. 정치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칸딘스키를 비롯하여 실험적인 예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러시아로 대거 몰려들고 러시아 미술의 일대 부흥이 일어났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이 병사한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소련의 미술정책은 정 반대의 길을 걷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예술의 기본적 방법이며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정확하게 역사적 구체성으로 그릴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고 규정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미술은 가차없이 탄압을 했다.
탄압 속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많은 미술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인상주의 미술조차 대학 강의가 금지되고 작품들이 미술관에서 철거되는 상황에서 추상회화가 설자리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만이 아니라 동구, 중국, 베트남 등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던 미술품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음악이 부르주아적이라고 하여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까지 자른 일이 있었으니 그 광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1934년 나치 독일에 의해 많은 독일표현주의 미술작품이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고 불태워진 사례를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상상력일까?
그렇다고 레닌이 추상화 애호가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감히 나 자신이 야만인임을 선언한다. 표현주의·미래파·큐비즘 그리고 그 밖의 ‘주의들’에 따른 미술 작품들을…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으로부터는 어떤 기쁨도 경험하지 못한다."라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당은 예술·문학 영역에서 모든 단체나 조류의 자유 경쟁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사상적 내용에서 가장 프롤레타아적인 경우조차도 어느 한 집단이 독점하게 할 수 없다.”(<예술·문학 영역에서의 당 정책>)라는 레닌의 정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더욱 확인하게 된다.
[ 85호] 4.29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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