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와 남은 자들⑦]"꽃이 피면 자식 생각나 견딜수가 없어요"

최동 어머니 김순옥

정경섭 jks@kdlpnews.org
한 평 남짓한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도매업을 하며 키운 아들이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자식들이 “남들에게 기가 죽을까” 시장에 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89년 감옥에서 출소한 아들은 폐인이 돼 돌아왔다.

‘인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된 아들은 “수배중인 동료들을 불라”는 수사관의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해를 했다. 감옥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다시 감옥으로 옮겨다녔던 아들은 발작증세와 실어증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앉아있는 아들을 보며 부모는 통곡했다.

“정신과에 입원시켰어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다가도 ‘누가 날 쫓아온다’며 택시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어요.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자 아들의 상태가 점점 호전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90년, 8월 7일. 산책 나간 아들이 없는 사이에 형사들이 집안에 들이 닥쳤다. 형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형사들은 아들의 책상을 엎고 무언가를 찾기만 했다. 형사들이 찾고자 했던 건 아들의 ‘유서’였다.
아들이 죽었단다. 한양대에서 분신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최동(당시 30세), 1980년 문학도의 꿈을 품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던 그가 부모의 곁을 떠났다.

아들이 떠나자 주위에서 “부모를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다. 부모는 정신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목젖으로 치솟아 오를 때가 많았다.

그해 10월, 평생 병원한번 가지 않았던 건강한 아버지는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몸이 악화됐다. 진찰결과 가슴혈관이 터져 있었다. 내출혈이었다. 결국 자식이 떠난 지 두 달만에 아버지도 떠났다.

“난 동이가 떠날 때 울었는데 아버진 안 울었어요. 자식이 죽은 걸 억울해 하면서 몸만 부들부들 떨었어요. 가슴혈관이 터졌으니 안으로 화병이 난 거죠.”

어머니는 꽃이 피는 봄이 못마땅하다. 집안에 화초가 많지만 꽃이 피면 모두 자른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올 수 없는데 꽃은 늘 새로 펴요. 꽃이 피면 죽은 내 자식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죠. 사람들은 1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러냐고 하지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지금도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살 수 있어요.”

이것만이 아니다. 먼저 간 아들 아래로 3남매가 대학을 졸업했지만 “죽은 아들은 대학졸업사진도 없는데”라며 가족끼리 졸업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전남 나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해 노점상부터 시작해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식을 키웠던 어머니는 누구보다 80년대를 혹독하게 살았다.
장남이 대학에 합격한 후 둘째가 서울여대, 셋째가 서울대, 막내가 이화여대에 줄줄이 합격했을 때는 시장에서 조촐한 잔치도 했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부천으로 내려간 장남 최동에 이어 둘째가 서울여대 총학생회장, 셋째가 서울대를 다니던 중 구속되고 나서부터는 ‘운동권’자식들을 쫓아다니며 말리기에 바빴다. 장남이 구속되고 셋째가 구속되던 89년에는 서울구치소와 영등포구치소로 하루건너 면회를 다녀야 했다.

84년부터 장남이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천지역에서 노동자로 일할 때, 어머니는 “따뜻한 이불이라도 덮고 자라”며 단칸방을 마련해 줄 정도로 끔찍이 자식을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 어떻게 해요. 밥이나 굶지 않고 따뜻하게 지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방을 마련해 줬죠. 원래 동이는 동생들하고 텔레비젼을 보다가도 우리 부부가 들어오면 부모님 피곤하시니까 빨리 자자며 동생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갔던 효자였어요. 그런데 운동만큼은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허리수술과 다리수술을 받은 어머니에게는 소원이 있다. 추모공원이 하루빨리 건립돼 망월동에 있는 자식을 데려오고 싶은 것이다.
“우리 유가협 식구들하고 모두 함께 자식들 묘에 갔으면 좋겠어요. 함께 가서 도시락도 먹고 아들 생각도 하고, 우리 아들같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할 수 있는 곳에서 자식 잃은 부모들하고 함께 있는 게 소원이에요.”

박정희 기념관을 짓고 있는 2002년, 장남과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소원은 언제쯤 가능할까.
[ 86호] 5.6 ~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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