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붉은악마 홈페이지 사진자료실
"주화입마 走火入魔"
무협 소설이나 무협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쉽게 말해 실력(흔히 "내공" 혹은 "공력"이라 부르는)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경쟁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무리한 수련을 시도하여 상처를 받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악역이나 주인공의 친구(?)에게 해당되는 사건이고, 주인공은 예외다. 왜냐하면 주화입마에는 "주제도 모르고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한 사람에 대한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월드컵 열기를 보고 있으면, 곧 바로 "주화입마"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히딩크 아저씨 한 마디에 언론이 울고 웃고, 모든 광고에 축구공이 등장하고, 2002명의 치어리더를 뽑으며 뿌듯해 하고,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이 16강 진출 전략을 질의하고 있는 이 놀라운 집단적 편집증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럴 듯한 월드컵 개최를 위해서는 노점상, 노숙자의 생존권마저 너무나도 손쉽게 짓밟을 수 있는 이 경이로운 열기는 거의 맹목적인 광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획일화된 집단적 열기에 비해 문화 월드컵의 전제 조건인 우리의 문화 환경, 삶의 조건은 어떠한가? 쓸만한 동네 체육관 하나 없는 생활체육 정책과 인프라, 획일화된 매스 미디어 외에는 경험하기 힘든 문화적 빈곤, 신자유주의적인 투자협정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화교류, 삶의 여유와 여가보다는 더 많은 경제력을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한 임금기계로서의 일상....
우리의 척박한 문화 현실과 월드컵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에, 나는 현재의 월드컵 열풍이 한국 사회에 또 다른 주화입마로 작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월드컵이 끝나고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는 자본주의의 주판알로 환원될 수 없는 난개발된 각종 시설들, 급조된 보여주기식 문화 행사들, 낭비된 세금 등의 상처만이 깊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은 스포츠를 통해 피지배 계급을 훈육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이다", "축구라는 것 자체가 백인 남성 중심의 재현물에 불과하다", "FIFA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초국적 기업 자체이다" 등의 무거운 이야기는 참기로 하자. 아니 적어도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욕망 속에도 나름대로의 문화적 가치와 창조적 생산성이 있다는 것 역시 진심으로 인정하자.
하지만 월드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주체를 민족주의, 국가주의, 경쟁주의,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만들려는 현재 우리 사회의 월드컵 신화는 과감하게 포기돼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최소한(!) 16강, 붉은악마, 대한민국, 스포츠 산업 등에 앞서 다양한 문화교류, 축제, 놀이, 여가 등과 관련된 우리의 문화적 권리들이 문화사회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재배치돼야만 한다.
월드컵에 대한 그 놀라운 집단적 열정의 아주 조금만이라도 우리의 일상, 삶의 문화에 아주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선전용 알리바이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정책이 절실할 때이다. 진정한 "월드컵 성공 개최"란 추상적인 국가 경쟁력과 국위 선양이 아니라 우리의 빈곤한 문화 환경과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는 과정이자, 집단주의에 의해 호명된 응원기계보다는 스포츠와 문화를 의미화하고 즐길 수 있는 주체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축구공이 없어도, 16강에 대한 편집증이 없어도 월드컵은 얼마든지 즐겁고 아름다운 축제일 수 있지 않을까?[문화사회]
이원재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 정책실장 redgang@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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