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론'을 대하는 법

아주 오래 전부터 대중들의 사회운동을 억누르고자 하는 인간들은 '배후세력'이라는 말을 전매특허처럼 사용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스크럼을 짜고 짱돌을 던지며 '민주주의의 시행'을 주장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순한 세력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괴뢰)라고 선전했으며, 이 선전을 통해 '싸움의 현장'에 혹여 '순수한 대중'이 접근하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그들의 짱구에 틀어박힌 시민의 존재론적 정의는 '도저히 정치의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용케도 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시민의 존재론은 현실적인 힘을 획득할 때도 있었다. 특히 '91년 봄'에 그러했는데, 분신을 조장하는 '죽음의 세력', 대학을 점령한 '주사파' 등의 이야기를 흘리면서 "순정한 당신은 운동권에 속고 있다"라는 관념을 퍼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급기야 '유서대필조작사건'을 정점으로 '파렴치한 운동권'과 '순수한 시민'의 분리는 성공적으로 이뤄진 듯 했다.

뭐, 그쪽에서 보자면 환장할 노릇이지만 사회운동이라는 게 한번 밟는다고 영면에 들지는 않는 법. 이후 시민운동이 성장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자라나자, 정치를 전유하려는 인간들은 대중분리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홍위병론'이 그것이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던 시민단체들은 한국현대사를 망가뜨린 정치꾼의 이 한마디 말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 새로운 버전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 동안 대중분리에 써먹던 흔한 수법은 주로 "운동권 뒤에는 북한이 있다!" 식이었는데, 새천년 버전은 "시민운동의 뒤에는 정권이 있다!"로 바뀐 것이다. 요컨데 '배후세력'이 기존의 정치세력으로 바뀌었다. 이로서 짱구를 만빵으로 굴린 이 말은 시민들과 시민단체의 사회운동을 분리시킴과 동시에 시민단체의 포지티브한 정치적 주장을 흠집내는 데 상당한 효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학하지 말자. 이 버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시민단체들의 '시민 없는 시민운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버전의 성공은 시민들의 정치혐오증 덕택이다. 기성정치라면 눈을 지긋이 찌푸리며 "다 썩었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교양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재미있는 세상이 바로 '홍위병론'의 원동력인 것이다. 정치를 망가뜨린 주역이 퍼뜨린 '홍위병론'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터전 위에서 기능한다. 이로써 '썩은 정치권'과 관련을 맺지 않으려는 '순정한 시민'은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
문제는 그 '순정한 시민'이 기성 정치에만 불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어떤 정치이건 '정치는 다 똑같다'는 관념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발언'을 잃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이익투쟁의 현장인 정치가 시민들에게서 멀어진다면 좋아라 할 사람들은 결국 지금까지 이익을 독점했던 쪽임이 분명한데도, 시민들은 정치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를 지극히 꺼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의사들의 파업'처럼 기득권 계층의 협박이나, '경제단체들의 대통령 후보공약 검증'처럼 자본의 국가 잡아먹기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쥬라기 시대의 도래이다.

문제가 명확한 것처럼 해법 또한 명확하다. '홍위병론'이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없애기 위해 시민운동이 더 정치적이 되는 것. 과거의 관변단체들과 같은 진짜 '홍위병들'이 출동할 때까지 정치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는 것. '순정한 시민'이라는 허구가 결국 불안정한 시장 속에 개인을 내팽겨치려는 음모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고발하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얻은 성과들을 시민들에게 돌리는 것. 어느 날인가 '홍위병론'에 이은 새로운 대중분리 버전을 퍼뜨리려고 해도 '쪽팔려서' 못하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시민운동은 시민들의 정치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류승준 (문화연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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