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표현과 억압

최근 문화판에는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작곡가 윤민석이 자신이 운영하는 민중가요 사이트 송앤라이프닷컴(www.songnlife.com)에 올린 노래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가 한나라당과 중앙선관위에 의해 고발당한 사건이다. 나는 아직 이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 노래 뿐 아니라 반미 감정의 열풍 속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공전의 히트곡 '퍽킹 유에스에이'도, 윤민석이 고발당한 이후에 발표한 '예전엔 미처 몰랐죠'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영국의 열악한 인터넷 사정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고물 컴퓨터에는 그 흔한 전용선도 스피커도 달려있지 않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겠어'

아무려나 나는 이 노래들의 가사는 잘 알고 있다. 이 노래 가사들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순발력 있는 풍자정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윤민석의 새로운 작업들이 80년대이래 나름의 부침과 변화를 거듭해 온 노래운동의 어떤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다. 인터넷이라는 주인 없는 매체를 통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대중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방식은 21세기 노래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하나의 귀중한 실험이다. 적나라한 물리적 폭력이 문화판까지 사정없이 할퀴곤 하던 시절, 불법 테이프와 게릴라식 현장공연이 노래운동의 존재방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윤민석의 노래들이 마치 신문의 만평처럼 그때 그때의 사회적 이슈들에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풍자의 매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노래운동의 전통에서 가장 빈약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풍자의 정신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거 우리 노래운동의 정서는 너무 무거웠고 지나치게 비장했다. 풍자란 기본적으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자기성찰이 가능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사회가, 또 우리의 노래가 분명 진보했다고 믿는다. 윤민석의 풍자정신이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증거이다. 윤민석의 노래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응은 그의 풍자가 그만큼 성공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또한 한나라당과 그 주변세력들이 '풍자의 시대'를 '풍자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퇴행의 욕망에 사로잡힌 세력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목되는 사건은 KBS '열린채널'이 진보넷의 참세상이 제작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에 대해 편성불가 판정을 내린 사건이다. '열린채널'은 수용자 주권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온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오래 동안 미디어 상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시청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발언할 수 있는 장치로서 '열린채널'의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이건 방송사의 시혜도 아니고 정부의 배려도 아니며 방송의 주인으로서 시청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그 당연한 권리가 상징적 수준에서나마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열린채널' 역시 우리사회의 진보를 보여주는 귀중한 지표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권리가 문전에서 거부당한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이 작품을 직접 보지 않아 뭐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소위 '시청자프로그램 운영협의회'에서 수정지시를 했다는 내용을 보면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속어 사용' 같은 것이 편성불가의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모르긴 해도 '주민등록증을 찢'으라는 선동이 이들에게는 마치 국기를 흔드는 반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 것 아닐까. 오래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입장에서는 이 작은 권력의 균열조차 참기 힘들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와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를 둘러 싼 두 사건은 얼핏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중의 새로운 문화표현방식과 이에 대한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맥락의 사건이다. 이는 현단계 우리사회의 갈등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을 통한 풍자와 시청자 프로그램을 통한 발언이 우리사회가 이룩한 진보의 상징이라면 이에 대한 고발과 억압은 분명 그 진보의 성과를 사상시키고 싶어하는 퇴행의 징후일 수밖에 없다.

김창남(성공회대교수·신문방송학)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편집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