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섭 jks@kdlpnews.org
83년 11월 29일.
남편은 어딘가 이상했다. “농성을 하니, 옷을 좀 가지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방에서 만난 남편은 “고생을 많이 시켜서 미안하다. 애들한테도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노조활동을 하는 남편이 못마땅했던 부인 조인식씨는 “내가 가게를 하니까 우리 식구는 먹고 살 수는 있다. 택시기사를 관두고 같이 장사하자. 당신이 꼭 농성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게다가 단식농성이라니….”
남편은 “노동자를 사람취급하지 않는다. 우리도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회사앞에서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지는 11월 29일이었다.
“그냥 모른척 하면 되는 일을 가지고 왜 저렇게까지 나서는지….”
가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부인은 불길한 꿈에 꾸었다.
남편이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대며 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뒤를 돌아서는 남편을 부인이 잡자 “당신과 나는 갈 길이 다르다”고 냉정하게 뿌리쳤다. 그 순간 꿈이 깼다.
부인은 꿈자리가 뒤숭숭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회사 관계자는 “지금 (협상이)잘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인 박종만은 82년 10월에 민경교통에 입사하며 택시노동자가 됐다. 노조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박종만은 회사가 “자주 결근을 한다”는 이유로 노조 사무장을 해고하자 농성을 계획했다. 당시에는 노조 전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노조 간부들은 자기 돈으로 사납금을 채우고 노조활동을 하거나 상담을 하는 일이 많았다. 박종만도 노조활동을 하고 나서부터는 집에 돈을 갖다주지 못했다.
83년 11월 30일, 철야농성을 마친 박종만이 회사 전무를 찾아갔다. 협상을 위해 갔지만 전무는 오히려 “농성에 가담했던 세명을 전원 해고시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박종만은 “내 한목숨 희생되더라도 기사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유서를 배차장 일지 뒷장에 쓰고는 석유를 뒤짚어 썼다.
가게 앞에서 남편의 친구들이 울면서 달려 왔다.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부인을 재촉했다. 병원에 간 부인은 혼절을 했다. 3시간만에 깨어난 부인은 남편을 찾았다. 붕대를 칭칭감은 서른 여섯 살의 남편이 두 아들을 남겨 놓고 이제 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2002년, 집권여당 특위사무국 수석전문위원이 된 부인 조인식(49)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먼저 전경을 거쳐야 한다. 전경에게 통과해도 좋다는 허락이 맡으면 현관입구에서 다시 한번 “내가 누군지, 이 곳에 왜 왔는지”를 밝혀야 한다. “일일이 기록해야 하니까 밝혀야 한다”는 것이 민주당의 설명.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상관없어요, 민주당 당직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유족으로 만나는 것이니까요, 인터뷰는 가능해요.”
이틀전 조 위원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민주당으로 오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가 10년동안 민주당 당직자로 근무했다는 걸 알았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조 위원이 “유족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말해 약속날짜를 잡았다.
“물론 남편이 떠나고 나서 많이 달라졌죠. 전 운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다 이소선 어머니,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 집회장으로 뛰어다녔죠. 저는 주로 운수업계 노조를 설립하는 역할을 담당했어요.”
조 위원은 남편이 떠나던 해에 세 식구의 생계가 책임졌던 가게까지 처분하고 운동에 뛰어 들었다. 남편의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지자 상근을 자청했다. 말이 추모사업회지 사실상 운수노조 조직화를 담당하는 사무실이었다.
‘운수노보’를 발행해 전국의 운수사업장에 배포하기도 했고 사회과학 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인천, 부천, 안산을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어요. 활동가들이 저를 의식화시키려고 많이 노력했죠. 나중에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상담도 할 수 있게 됐어요.”
86년 조 위원을 포함해 열한명의 유족들이 모여 유가협을 결성했다. 조 위원은 4년간 유가협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91년에 김대중 총재가 부르더니 함께 일하자고 했어요. 몇 년전에도 같은 제의를 받았지만 제가 거절했었는데 그때는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에 들어오게 된 거죠.”
조 위원이 담당했던 분야는 노동부문 조직화.
“정권교체가 소원이었어요. 그래야 명예회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내 자식도 유자녀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정권교체라고 생각했어요.”
조 위원의 소원인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많은 유족들이 유가협내에 있다. 또한 의문사도 제대로 밝히지 못해 가슴을 쥐어짜고 있는 유족들이 존재한다. 조 위원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저도 속이 상해요. 남편도 명예회복을 받는데 1년이 넘게 걸렸어요. 자꾸 당시 증거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화가 나더라구요. 명백한 사건인데도 심의위원회에서는 증거위주로 나가요. 심의에 통과하지 않는 유족들은 많은 상처를 받을 거 같아서 가슴이 아파요. 너무 증거위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들어갈 때 어려웠던 것과는 달리 민주당을 나설 때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아직도 집회현장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조 위원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개인적으로는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87호] 5.13 ~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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