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 금지된 시절이 있었다. 법학이나 정치학 등 사회과학분야 강의실에서 토론이 사라졌고 강의 도중 아예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교수도 있었다. 강의실 밖에서도 학생이 서너 명만 모이면 교직원이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와 학원사찰로 대학 자율화 움직임에 족쇄를 채웠고 한일회담과 3선개헌 반대에 앞장섰던 상당수 교수들을 ‘정치교수’로 지목해 강단에서 내몰았다.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의 주한미군 부분 철수, 남북공동성명 발표 등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를 빌미로 ‘10월 유신’을 강행, 입법·사법부까지 3권을 장악했다. 박정권은 국회 해산과 비상계엄 선포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일체의 찬반토론을 금지한 상황에서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중임제한 없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고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법관을 추천 또는 임명하며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철권통치의 길을 열었다. 특히 유신헌법의 부정·반대·개정 및 폐기 주장이나 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 기간의 절반에 달하는 4년 7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투옥돼 온갖 고초를 겪었고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결국 유신헌법은 1979년 10·26사태로 정권의 주인공과 함께 막을 내렸다. 유신체제 7년 동안 양심수는 총 2704명.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정보기관에 의해 조사를 받은 사람만 해도 모두 1204명에 달하고, 긴급조치로 인해 징역을 산 사람만 무려 1756명에 이른다.
사회당 기관지 이현주 / lhj@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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