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편집위원ㆍ성공회대 연구교수(한국정치)
참혹한 학살의 공포와 그것을 이겨낸 해방공동체의 벅찬 감격이 함께 어우러진 1980년 5월 열흘간의 핏빛 광주, 역사의 비극이자 동시에 민주변혁투쟁의 우뚝 선 거봉으로서의 ‘5.18’. 그토록 처절하고도 아름다웠던 그날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나는 묻는다. 5.18은 끝났는가?
독재와 권위주의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그 암울했던 시절, ‘5월 광주’는 우리 사회에서 애정과 증오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모순된 공간이었고, 민주주의의 진전과 해방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였고 최대 최고의 화두였다.
한편으로 5.18의 실체적 진실은 강요된 침묵과 공식화된 지배의 기억 속에서 독재집단과 그 추종세력들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은폐되어 왔다.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난’은 그 집약적 표현이었으며, 이들의 책략은 지역주의의 망령과 결합되어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5월 광주를 기억하라’는 구호가 모든 집회와 시위에서 맨 앞에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독재와 불의와 거짓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상징하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한때나마 민주변혁을 꿈꾸었던 사람치고 5.18의 한과 본뜻을 마음속 깊이 되새겨보지 않은 이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로부터 투쟁의 자양분과 추동력을 제공받아 온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광주’와 ‘5.18’을 호명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했고, 계속된 ‘광주 순례‘는 시대의 절망을 넘어서기 위한 식을 수 없는 저항과 용기와 열정의 춤사위이자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서의 존재 확인 과정 그 자체였다.
5월 광주의 기억은 적이 누구인가를 환기시켜 내면서 해방공동체를 향한 열정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5.18의 자식’이자 ‘광주의 전국화’인 87년 6월 민주항쟁, ‘광주학살·5공비리 원흉 처단투쟁’, 학살자들의 철면피한 본색을 세상에 폭로한―비록 정치권의 야합 속에서 6공 최대의 희극으로 종결되기는 했지만―80년대 후반의 5공 청산 청문회 등등은 실천을 통한 기억의 지속적인 환기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십 수년의 시간이 지난 뒤 비로소 5.18은 ‘패배한 성공’으로 새롭게 부활하였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문민정부의 정략적 선회를 압박한 가운데 마침내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 역사적인 5.18 재판을 이루어낸 것이다.
5.18 특별법 제정과 5.18 재판,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과 구속 처벌자들의 무죄 처리,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국가기념일 지정,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 망월동 신묘역의 건립과 정부 주관의 다양하고도 성대한 기념 행사---. 그간 희생자들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이 요구해온 과제가 하나 둘 해결되면서, 5·18은 이제 그 힘찬 진군의 발걸음을 멈추고 ‘잊혀진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그 와중에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살 주모자들이 잠시 머물던 감옥문을 의기양양하게 나선 것이나, 이들을 국가 원로로 극진한 예우를 해 온 현 정권의 몰역사적인 정략적 행태―국고 지원에 의한 박정희기념관 건립 추진은 그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가 함께 묻혀져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천박한 정치 논리에 역사를 팔아넘기고 만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한 동의로 인해, 온 국민의 뇌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5월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은 면죄부를 받았으며, 단지 한 때의 불행한 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5.18은 끝난 것일까. 질풍노도의 80년대와 그 여진으로서의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5.18, 그것은 이제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는 흘러간 옛 노래일 따름인가? 두 해 전 이른바 ‘386세대’의 대표 주자를 자칭한 몇몇 인사들이 벌인 ‘5.17 술판사건’처럼 그것은 홀가분하게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역사의 무게’만을 담고 있을 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억/망각과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며, 기억들은 단순히 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화되고 물질화되어 생활 속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삶까지도 지배하기 때문이다.
잊혀진 5.18을 살아 있는 역사로 되살려내는 것, 그리하여 오늘의 위기를 넘어 내일의 희망을 일궈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 88호] 5.20 ~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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