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생각해 보면 정치란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 앞에서 무조건 고함지르고 울며불며 떼를 쓰고 드러눕던 머리 검은 짐승새끼가 “엄마, 엄마가 저걸 사주시면 전 참 기쁠 거예요”하고 말하는 천사 같은 어린애로 변할 때, 그 아이는 기초적인 정치적 화술을 터득한 것이다.
TV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아이를 “공부해!”하고 소리지르며 때리는 것이 아니라 “숙제를 잘해가야 선생님이 이뻐하시지”라고 살살 구슬릴 때,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기초적인 정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행사해야만 하는 ‘협상의 기술’인 정치는 그래서 인간다운 것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에는 정치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이빨과 발톱이 결정하니까.
그래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있는 곳에는 정치가 없다”고 말했다. 흔히 정치를 ‘힘 있는 놈들의 판’으로 생각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오히려 물리적인 힘의 우세가 곧장 사회적인 강제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협상과 반전의 장(場)인 정치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현실 정치가 그런 협상과 반전을 폭넓게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정치 염증’을 가져온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현실 정치는 금력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회적인 우세를 점하는 약육강식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였고, 그곳에서 사회적인 이상(理想)의 실현이라든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아슬아슬한 쾌거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니, 그곳에서는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다윗’의 모습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현실 정치는 거의 정치가 아니었다.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최근 ‘초유의 정치 드라마’였던 노사모의 활약은 정치판에서 국민이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어느 정치인의 팬클럽이 예상을 뒤엎고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방식으로 그 정치인을 얼마만큼 띄워 주었다든가, 거기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저널리즘의 호들갑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노무현이라는 ‘다윗’을 매개로 국민은 서서히 정치판에서 입을 여는 방식, 금력과 권력에 눌리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협상의 방식들을 체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보았더라면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부활’이라고 무릎을 쳤을 만하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장막은 그리 만만히 걷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광역 지자체 선거를 맞아 언론들이 앞다투어 초청하는 후보들에서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같은 ‘군소 정당’의 후보들이 빠져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이문옥 민노당 서울시장 후보 같은 경우 90년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으로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으며,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추대로 나선 인물이다. 이런 후보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세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양당의 후보만을 초청해 토론회를 가진다는 것이야말로 ‘현실 정치’가 ‘진짜 정치’를 부정하는 폭거다. 최소한의 반전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정치,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 정치’고 ‘진짜 정치’고 간에 왜 이 풍광 좋고 봄볕 좋은 오월에 골치아프게 정치를 생각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행여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가슴아프다. 22년 전 바로 그 볕 좋은 오월에, 우리는 ‘정치가 없었던’ 곳에서 일어난 적나라한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80년 광주는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를 되살려야 할 책무를 원죄처럼 지운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한, 이는 피해갈 수 없는 책임이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오월은 정치의 달이다.
소설가 송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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