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기세에 눌린 좌파의 눈치보기

네덜란드 총선에 우파 바람

장광열/네덜란드 통신원 jjagal@yahoo.co.kr
지난 15일 치러진 네덜란드 총선에서 네덜란드인들은 현 집권연정을 심판했다. 노동당, 자유당, 민주주의66의 좌우 연정은 97석에서 54석으로 의석을 절반 가까이 잃었고, “새 정치”를 부르짖다 비명횡사한 핌 포르타운의 당은 26석을 얻으며 단숨에 제2당이 됨으로써 네덜란드 정치사를 새로 썼다. 이로써 ‘핌 포르타운 돌풍’을 타고 우파인 기독민주당과 핌 포르타운당이 주도해서 우파 연정을 구성하려고 물밑협상이 진행중이다.

네덜란드 총선이 막판으로 치달으며 열흘 앞으로 다가선 지난 6일 라디오 방송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우파신당 ‘핌 포르타운 당’의 당수 핌 포르타운(54)이 한 동물애호 환경운동가에게 총격을 당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치적 무관심이 심각한 지경에 있던 네덜란드에 신선한 우파 바람을 불고왔던 그였기에 국민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핌 포르타운은 사회학 교수였는데, “네덜란드는 꽉 찼다. 더 이상 외국인을 받지 말자”는 주장을 하면서 우파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지방에서 시작된 ‘살기좋은 네덜란드당’이 그를 당수로 영입하면서 그는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했다.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던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종, 종교, 성별 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은 차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헌법 제1조를 개정하자”는 폭탄발언을 해서 네덜란드 정계를 발칵 뒤집었다.

그는 “외국인들 때문에 네덜란드가 점점 살기 안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이슬람문화는 남녀차별이 심하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후진문화”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기존 정당들은 그를 극단적인 우익이라고 몰아붙였고,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살기좋은 네덜란드당’은 그를 당대표에서 사퇴시켜, 사실상 당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곧바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핌 포르타운당은 36% 득표를 얻어 노동당을 꺾고 단숨에 로테르담시 정부의 집권당이 됐으며, 여론조사에서도 총선에서 15% 이상의 의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어, 신당 돌풍을 일으켰다. 집권 좌우 연정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다.

또 강력범죄의 증가에 정당들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외국인들을 그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범죄를 강력하게 단속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주효했다. 그가 시원스럽게 기존 정치인들을 비난하면서 그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낀 대중들이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부의 예산 삭감 때문에 위기에 빠진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그 분야에 예산은 더 배정하지 않겠다, 연금생활대상자를 축소하고 외국인 난민을 안 받기 위해 국경을 빈틈없이 막겠다, 에너지 산업을 민영화하고 가동 중단중인 핵 발전소를 재가동시키겠다는 등의 정책들을 제시해, 사실은 현 정부보다 더 사회보장제도를 후퇴시키고, 시장경제를 강화할 것임을 내비쳤다.

그가 부각되는 데에는 9.11 테러사건 이후에 유럽에서 퍼지고 있는 이슬람권에 대한 반대 정서가 큰 역할을 했다. 다른 정당들은 겉으로라도 모든 이슬람이 문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으나, 그만은 이슬람은 후진적인 문화라고 역설했고, 그것은 사실 대다수 대중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다른 정당들도 외국인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있으며, 난민규제가 선거의 주된 이슈가 되었고, 좌파단체들은 선거 직전인 11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피살당하자 핌 포르타운당은 좌파정당들이 그를 증오해서 죽게 했다며 비난했다. 우파들의 기세에 좌파들은 눈치를 보며 핌 포르타운당에 대한 비판도 못하고 있었고, 선거를 코 앞에 둔 상황에서 모든 정당들은 공개적인 선거운동을 중단했다.

핌 포르타운이 죽은 날 그의 지지자들은 “모든 검둥이들을 독가스실로 보내자”는 증오의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불태우며 노동당을 살인의 책임자라고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핌 포르타운의 죽음은 현 집권당에 대한 염증에 불을 지폈고, 그는 정당명부 후보 1위에 남아 우파신당의 시대를 연 ‘순교자’가 됐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노동당의 우경화를 비판하며 점점 후퇴하는 복지제도의 회복을 주장해온 사회주의당이 5석에서 9석으로 성장해 우파의 공격에 맞대응할 선수로 등장한 것이다. 조용했던 네덜란드 정치판에 요란한 싸움이 시작됐다.
[ 89호] 5.27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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