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월드컵 빛과 그림자]누가 그 많던 노점상을 다 쫓아냈을까

[르뽀]월드컵 개막하던 날 상암동 경기장

윤재설 dllp21@kdlpnews.org
합정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여느 평일 퇴근길 지하철과 다를 바 없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일인 5월 31일 저녁 5시 55분 6호선 지하철 합정역에서 파란색 상의를 입은 프랑스 응원단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열차에 오르자 지하철은 갑자기 만원이 됐다. 조용하던 지하철은 세계언어전시장이 된 듯 한국어, 중국어, 불어, 영어로 가득 찬 채 상암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5분 후 열차가 월드컵경기장역에 도착하자 가득 차 있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프랑스 유니폼과 세네갈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양국의 개막전 응원단이 오늘이 월드컵 개막일임을 실감케 했다. 월드컵경기장 안에서는 이미 식전행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노래와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동문으로 향하는 출입구 앞에서는 이명박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등이 자리를 잡고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자 어린이들이 “웰컴 투 코리아”를 외치며 외국인들을 맞이해 준다. 곳곳에 배치된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하고 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장애인리프트 근처의 전투경찰 행렬 뒤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깃발이었다. 겹겹이 둘러싼 전투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동권연대 회원 30여명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싶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
하지만 이 절박한 목소리는 전경들의 키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마포농수산물시장쪽 입구에 가보니 까르푸노조의 1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월드컵경기장 근처 1Km 안에서는 집회를 불허한다는 경찰의 방침에 따라 까르푸노조는 이날 프랑스 경기에 맞춰 한국어, 불어, 영어로 쓰여진 피켓을 제작, 이날 오후 3시부터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1인시위에 참가한 조합원 이영숙(45·일산점 근무)씨가 프랑스계 대형할인점 까르푸의 노조탄압 사례를 고발했다.

“임금협상을 5차까지 진행했는데 결렬돼 중노위까지 올라갔다. 노조는 양보를 하면서까지 조정신청을 받아들였는데 회사는 거부했다. 노조가 합법적인 사복투쟁을 벌이는데 회사는 경고장을 보내며 위협하고 있다.”

월드컵 노사평화선언을 추진해온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이날 월드컵경기장에는 파업중인 사회보험노조 조합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경찰의 집회불허 방침으로 집회는 열지 못했지만 조합원들은 투쟁조끼를 입고 경기장 주변을 걸어다니며 ‘시위 아닌 시위’를 벌였다.

월드컵경기장 주변도로는 이날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통제되고 있었다. 한산한 거리에 이따금 행사차량과 셔틀버스만 움직일 뿐이다. 잠실야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점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경기장이 가까와 구경 나와봤다는 김성환(38·성산동)씨는 “시내에서도 노점상이 사라졌는데 여기라고 있겠냐”며 “월드컵경기장 근처에서 노점상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노점상이 없는 공간에는 코카콜라, 버드와이저, 아디다스, 케이티, 현대자동차, 현대해상 등 ‘피파 월드컵 공식 파트너’들의 행사부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000가 새롭게 시작하는 서비스의 이름”을 물어보는 뻔한 홍보성 퀴즈를 내고 상품을 나눠주는 곳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현대자동차의 신차 홍보, 코카콜라의 기념품 판매, 2006년 독일 월드컵 경기 입장권을 건 아디다스의 타임캡슐 등이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티셔츠, 수건, 열쇠고리, 모자 등 ‘공식’ 기념품의 판매대도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원산지가 중국으로 표기된 한일월드컵 마스코트 ‘아토’, ‘케즈’, ‘니크’ 봉제인형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분위기를 한껏 높이는 공식 파트너가 아닌 노동자, 장애인, 노점상, 철거민들은 이곳에 없었다. 아니, 월드컵이 끝나는 날까지 공식 파트너가 아닌 이들은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 90호] 6.3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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