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도 '인간답게'
동대문에서 노점상을 하는 정병천씨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특히 노점상들은 용역강패와 경찰이라는 상이한 집단의 이질적인 폭력을 동시에 감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용역과 경찰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생존의 현장으로 나선다. 전국노점상연합 동대문 지역장 정병천(39세)씨 역시 폭력에 굴하지 않고 노점 현장에서 노점상들과 함게 투쟁하는 노점상중 한명이다.
정병천씨는 동대문 운동장 미도파 백화점 옆에서 건빵을 팔고있다. 정씨는 85년부터 노점상을 시작했다. 그가 노점상을 하게 된 계기는"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어서"이다. 정씨가 말하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서"라는 말에는 이 땅 빈민들의 현실이 그대로 녹아 나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가 되는 것, 또 하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범죄자가 되는 것, 그리고 단속을 무릅쓰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심화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범죄자가 될 수 없어 죄 안 짓고 먹고사는 길은 노점상뿐이다. 정병천씨도 죄 안 짓고 먹고 살길을 찾아 노점상이 된 것이다. 정병천씨는 86, 88년 심한 노점단속을 겪고 87년도에 노점상연합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89년 노점상 서울경기지방 전면 단속이 있던 당시 전노련은 명동성당 농성 사수대로 들어가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2002월드컵과 88년 서울 올림픽은 노점상들에게는 매우 비슷하다. 언론에서는 계속 노점상 단속에 대한 정당성을 유포하고 서울시는 정류장과 지하철 입구를 단속하며 연인원 600여명을 동원하여 전면 싹쓸이를 시도하고 있다. 정씨에 따르면 "용역은 거의 전과자이며 경찰이 보는 아래 노점 단속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폭행만 하지만 전혀 잡혀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단속에 대해 정씨는 "유명무실한 전시 행정"이라 못박는다. 오히려 노점상 스스로 시범 정비 구간 만들어서 자율질서로 충분히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노련이라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란다.
과거 전노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 전에는 파출소 방범이 노점단속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매일 상납비를 500원에서 1000원씩 내기도 했으나 전노련 결성이후 그런 일은 없어졌다.
정병천씨 가족은 노점상 가족이다. 부인 역시 동대문지역에서 먹거리 장사를 하고 있다. 그는 결혼을 아주 늦게 했다. 막내로 태어난 그는 노점상연합 활동을 계기로 "늦게라도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97년 결혼해 부모님을 보시고 살고 있다. 같이 노점상하는 분의 소개를 받았지만 연합회 활동으로 인해 연애도 별로 못해보고 결혼했다. 부인 역시 노점을 하면서 강제철거를 당해본 설움을 아는 사람이라 정씨의 연합회 활동을 이해하고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정씨의 수입이 작은 것도 이해해 준다. 특히 아내에게서 노점상 연합회 활동에 대한 많은 조언을 얻고 있다.
그는 80년대 학생운동을 보면서 "학생들이 비싼 학비 내고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거다 생각했으나 노점상하면서 보니 당시 학생운동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자신 역시 젊었기 때문에 노점상 회원으로서 선봉에서 투쟁해왔다. 94년 상대지역 시간 투쟁을 할 때는 경찰이 정씨를 지목해서 정씨가 강제 연행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노점상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보호로 연행되지 않았다. 그때가 그에게는 가장 보람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정씨가 투쟁을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당시 함께 싸워준 노점상 할머니, 아주머니 때문이다.
그래서 정병천씨는 "노점상이라고 꿀리는 것 없고 아들에게도 아버지는 노점상이라 떳떳히 말할 것"이라며 자신의 직업에 긍지를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 노점상들은 자식세대에게는 아버지가 못 배운 것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씨가 "자식이 노점상 하는 것을 말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는 "주로 많은 노점상들이 사업 같은 것을 망하고 마지막으로 택할 수 있는 길이며 노점상들은 전부 마음 좋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노점상은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작은 공동체인 것이다.
이런 정씨에게도 악이 바칠 만큼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94년도 수원남문시장 조직 사업 중 용역들 한 두명과 시비가 붙어 용역들에게 지하실로 끌려가 50여명에게 집단 폭행 당해 엄청나게 맞은 것이다. 그때 용역들에게 맞을 때가 살면서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경찰은 역시 현행범인 용역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씨는 그것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었다. 다른 회원이 맞을 것을 자신이 맞았다고 생각하고 더 악이 받쳐 "맞은 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씨는 동대문지역에서는 젊은이에 속한다. 현재 동대문지역이 노점상 연합회중 연령이 가장 높다. 동대문지역 노점의 70%가 할머니 아주머니이고 50대는 청년층에 속한다. 그곳에는 경동 재래시장이 있어 노점상 역사의 산증인들이 많다. 그들은 젊어서부터 어렵고 없이 살아 평생 노점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온 사람들이다. 반면 서부지역은 젊은층들이 많다. 주로 IMF이후 노점상이된 젊은이들이다. 정씨는 "사회정책으로 인해 마땅한 일자리 없는 요즘은 고학력자 들도 상당히 많아 졌다"고 설명했다. 또한 자식이 노점을 물려받기도 해 젊은 층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는 젊은 신세대 노점상들이 노점상 연합회의 투쟁의 역사를 잘 몰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과거부터 용역들과 투쟁 속에서 노점으로 생존을 유지한 분들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전노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노점상들은 국제적인 행사마다 집중 타켓이 되어 왔다. 이번 2002 월드컵도 마찮가지다. 정씨는 "조직내에서 자율적인 질서로 보행권을 확보하고 각 지역별로 무질서한 부분을 거듭나는 계기의 사업도 하고 있다"며 "시민과 노점상사이에 이해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점상들은 집회가 있으면 그날의 일당은 공치게 된다. 하지만 생존의 위기 앞에 일어서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노점상조차 노점상집회에서는 가장 선봉에 서있는데 젊은 정씨는 결코 선봉에서 물러 설 수가 없었다. "우리 투쟁은 정당합니다. 생존권은 천부적 인권인데... 스스로 자립해서 살겠다는데 오히려 국가에서 단속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국가는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서 노점상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젊기에 앞으로도 계속 투쟁 할 것이라는 자신감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노점하면서 구속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었던 많은 회원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탄압도 함께 한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그리고 "노점상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며 "전체 회원들이 똘똘 뭉쳐 단결할 때 생존권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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