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열풍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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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태풍 "히딩크호"가 강타중이다. 5월에 열렸던 잉글랜드 및 프랑스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예보되었던 히딩크호가 실제로 6월 4일 월드컵 경기장을 강타, 예상을 뒤엎고 유럽의 강호 폴란드 팀을 대파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놓고 있다. 축구 팬들에게 한국팀이 월드컵 경기에 참가한지 48년만에 이룬 첫 승리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짐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 전체가 이렇게 열광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지난 4일 저녁 밤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열기로 나라 전체가 폭발할 듯한 조짐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근래에는 6.10 항쟁 때의 국민적 열광에나 비견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월드컵 첫 경기의 승리, 또는 16강 진출이라는 게 정말 이렇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웃기는 얘기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모두 그렇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아가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 중국이나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도 한국이 아시아의 체면을 살렸다며 열광한다고 한다.

월드컵은 세계적 참여의 규모로는 올림픽에 버금가지만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선수들이 참여하며, 단일 종목이어서 집중력이 높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대의 이벤트다. 때문에 여늬 경기와는 달리 여기서의 승부가 국가적, 인종적 체면을 좌우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했던 이래 36년만에 아시아 국가로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월드컵의 높은 벽을 실감나게 한다. 그 높은 벽은 체력과 전술, 조직력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보다 우월한 종족이라는 물증이자, 근대화 이래 아시아를 짓눌러온 악몽같은 콤플렉스의 생생한 징후로 기능해왔다. 따라서 이 장벽의 돌파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지난 150여년 동안 아시아인들의 내면에 서구 콤플렉스를 심어온 "종속적 근대화"의 일방적 역사에 파열구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는 유럽에 뒤지지 않을만큼 성장했으나 이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대등한 경쟁 상대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사실의 상징적 선포라고나 할까. 다른 하나는 그 돌파구를 만든 주체가 바로 이전에는 북한이었고, 지금은 남한이라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그늘에 가려있던 우리가 바로 아시아의 체면을 살린 승리의 주체라는 사실은 한국인의 정신적, 육체적 잠재력이 오히려 가장 뛰어나다는 물증이다.

여기에 사족 하나 덧붙이고 싶다. 축구야말로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잠재력을 가장 집약해서 펼쳐보이는 경기이며, 비유하자면 "공 사냥"이라고도 하겠다.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궤적을 예측하는 동물적 육감, 근육 속에 접혀진 에너지를 최단시간 내에 펼쳐내는 기와 호흡의 조절, 극한을 이겨내는 인내심과 협동심 등이 축구와 사냥의 공통 요인이다. 이런 특징을 요약하자면 축구는 프랙탈적인 접힘과 펼침의 강도와 속도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운동이다. "타겟" 사격이 아니라 "조닝"(zoning) 사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려온 한국 "국궁" 전통에는 비행하는 물체의 낙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하는 동물적 본능이 아로 새겨져 있고, 예나 지금이나 가무를 즐기는 한국인의 육체적 능력에는 프랙탈적인 감각과 지혜가 보존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은 축구를 잘할 수밖에 없다. 66년 월드컵 당시 북한의 8강 진출이나 그동안 한국축구가 아시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 온 사실은 이런 잠재력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히딩크가 과학적 전술을 통해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한국인의 이런 프랙탈적인 잠재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런 잠재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상업주의와 파시즘적 인종주의, 스타시스템의 절묘한 결합체인 월드컵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는 꼴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자살골 먹은 선수를 공항에서 총으로 쏴죽인 사건이나 광란의 폭력을 행사하는 <훌리건> 사태는 월드컵이 한편으로 부추기기 쉬운 민족주의의 광기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월드컵 기사로 지면의 절반 이상을 도배하는 일간지들이나 방송 3사의 미친듯한 경쟁은 현재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히딩크 열풍"의 진실을 스타시스템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왜곡할 위험이 크다. 인터넷에 나도는 "히딩크의 운명"이라는 우스개 글에서도 위험한 아이러니가 감지된다. 우리가 8강에 오르면 그는 강제귀화 당하고, 4강에 오르면 그가 정몽준과 함께 축구당을 만들어 영수가 되고, 결승에 오르면 모든 종교가 사라지고 그를 중심으로 영구적인 제정일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사적 사건'에서 히딩크가 차지하는 역할이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지는 히딩크 열풍의 의미를 개인적 '우상숭배'로 변질시키는 대신 변화의 기점에 선 한국사회의 과거 및 미래와 연결시켜 보는 데 있다.

6월 7일자 한겨레 '길라잡이'에서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이런 국민적 열광의 이면에는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며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히딩크에게서 배울 것 투성이다. 선수 선발에서 축구계의 고질인 학연구조를 성공적으로 혁파한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영웅이다.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 이렇게 학연 혹은 지연 구조를 성공적으로 혁파한 사례가 있는가. 반봉건적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선수들 내부에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발적 단합의 기풍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는 듣던 중 반갑기 그지없는 얘기"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물귀신처럼 끌어내려온 것이 바로 학연, 지연, 혈연의 3중적 질곡이라는 사실은 3척동자도 안다. 히딩크의 역할은 비록 축구라는 작은 영역에서지만 이 질곡을 깼을 뿐 아니라, 그것이 깨질 때 억눌렸던 잠재력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순수한 것"인가를 만천하에 실증했다는 데에 있다. 그 역시 한국팀을 맡게 된 진정한 이유가 바로 우리 팀의 순수한 열정과 잠재력에 감동했다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는 바, 히딩크호 태풍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오늘 히딩크호 태풍의 역사적 의미는 4.19와 5.18, 6.10 항쟁에서 드러났던 국민적 열망의 빛나는 순간들과 역사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미 금년 봄 우리는 정치판을 강타한 "노풍"으로부터 6. 10항쟁 이후 누적된 역사적 질곡을 깨려는 젊은 세대의 열정을 강도높게 체험했다. 지금 "히딩크 열풍"의 진실은 히딩크 개인의 탁월함보다는 사실상 "노풍"에서 읽혀진 발본적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마그마"와 연관시킬 때라야 비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노풍"의 진실이 노무현 개인에게 있지 않듯이 "히딩크 열풍"의 진실 역시 히딩크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히딩크의 역할은 축구판에 공정하고 자유로운 게임의 규칙, 즉 민주주의의 원리를 확산시킨 불씨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히딩크는 한국축구의 문제가 우리의 작은 키나 약한 체력이 아니라 3중의 질곡을 재생산해온 대한축구협회나 축구 지도자들에게 있었음을 백일하에 보여주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질곡에 책임이 있는 정몽준이 이번 열기를 이용해 대선 후보에 도전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얘기다.

이제는 사그러든 "노풍"에 이어 전국을 다시 달아오르게 하는 "히딩크 열풍"은 한국사회가 축구계처럼 개혁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황선홍이나 유상철이 훌륭한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듯이 우리 국민들도 훌륭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를 폄하하게 만든 부패한 지배구조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히딩크로부터 배우는 대신, 민주항쟁과 민중항쟁의 자랑스러운 역사로부터 스스로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제 17년만에 사회 변혁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다시 모이고 있다. 이를 상업주의와 개인숭배로 재영토화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16강이나 8강에 오를 경우 더욱 폭발하게 될 국민적 에너지의 조준점이 "히딩크의 운명"에 맞춰질 것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 개혁의 운명"에 맞춰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shkwang@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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