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민주당 정범구 대변인이 발표한 논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 벌어지는 한·미전이 재삼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의 논평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모두 불굴의 투혼으로 반드시 승리해 16강 진출은 물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드높여 줄 것으로 확신한다”
수백만명의 한국인이 ‘붉은악마가 돼라(Be the Reds)’는 ‘불순한 구호’가 새겨진 붉은 셔츠를 입고 경기장 스탠드와 서울 도심을 그야말로 시뻘겋게 물들였건만, 이날 시합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 무승부로 끝났다. 나는 두 대변인과 똑같은 심정으로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또 포르투갈을 꺾어 16강 토너먼트에 올라가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이나 ‘우수성’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난 대회까지의 성적을 보자. 65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그중 10개국은 단 하나의 승점도 얻지 못했다. 10점 넘게 승점을 올린 나라는 30개국에 불과하다.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물론이요, 선진국으로 손꼽는 일본과 캐나다도 여기에 들지 못했다. 15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4무10패, 다섯번 출전해서 겨우 4점을 챙겼을 뿐이다. 이것이 과연 ‘저력’이 없고 ‘우수’하지 못한 민족이기 때문인가.
반면 본선 16강 정도가 아니라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아 본 나라도 여럿 있다. 브라질은 여섯번 결승에 올라 네번 우승했다. 이탈리아는 세번, 독일과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두번,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한번씩 패권을 차지했다. 이 모두가 ‘저력’있는 ‘우수’한 민족이라 그런가. 최근 들어 전력이 급상승한 나라도 여럿 있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 8강에 올랐던 카메룬, 이번 대회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침몰시킨 세네갈, 1994년 미국 대회에서 9위를 차지한 나이지리아가 그렇다.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민족의 저력과 우수성’을 갑자기 고양시킨 그 무슨 대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대 월드컵 본선 승패 기록을 아무리 따져봐도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적과 ‘민족의 우수성’ 사이에 모종의 함수관계나 상관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축구를 하는 것은 민족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딱 열한명이 한다. 월드컵에 출전한 국가대표팀은 민족의 대표가 아니다. 1998년 프랑스가 우승했을 때 극우파 정치인 르펜은, 저게 무슨 프랑스 대표팀이냐며 혀를 끌끌 찼다. ‘순수 프랑스 혈통’ 백인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이고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온 이민자의 후예들이 펄펄 날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탓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 대표팀에도 백인과 유색인이 뒤섞여 있다. 동유럽 전통 강호 폴란드 대표팀 스트라이커는 아프리카 출신 올리사데베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 대표팀은 가장 확실한 ‘인종 연합군’이다. ‘민족의 우수성’을 들먹이는 분들에게 묻는다. 이번 대회에서 미국이 우승한다면 그 영광을 어떤 ‘민족’에게 돌리겠는가.
축구는 발과 머리로 하는 부정확한 단체경기이기 때문에 박진감이 넘치고 이변이 많이 일어나는 재미있는 종목이다. 기록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편을 둘로 갈라야 한다. 보는 사람은 연고가 있는 어느 한 편을 응원하게 된다. 고교시절 체육시간에 머리카락에 조금이라도 곱슬기가 있는 사람과 전혀 없는 사람으로 편을 갈라 축구를 하곤 했다. 친구들은 어느 한 쪽을 응원했다. 그러니 우리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축구는 어디까지나 축구일 뿐이며 수많은 스포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월드컵이 어떻게 끝나든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한국팀이 잘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기에 ‘민족의 우수성’을 끌어다 붙이는 ‘극우적 발상’은, 일본에 졌다고 난동을 일으킨 모스크바 술주정뱅이들의 행태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시사평론가 유시민 waru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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