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영화진흥위원회에 바란다

지난 5월 말, 한국 영화진흥을 위한 새로운 사령탑이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구성과정에서, 그리고 구성 이후에 다소간의 잡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의례 있을 법한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았고,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무난한 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인선과정을 책임진 문화관광부가 1기에서와 같은 혼란을 피하고자 "지나치게 '무난'에 집착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또한 가지고 있다. 사실 필자가 위원들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고, 평가할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인선 결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화관광부가 한국 영화산업과 영화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철학이나 비전 없이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로 인선에 임했다면, 문화관광부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점은 지적해야겠다. 곁가지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큰 방향을 잡자

2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과 영화 문화의 현주소를 파악해야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한국 영화산업과 문화가 어떻게 흘러왔으며, 향후 어떻게 진행되어갈 것인가를 인식하는 가운데, 오늘날 영진위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세세하고 정밀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한국영화 통사 한 권, 영화 한 편에 대한 흥행 통계 하나 정확하게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놈에 정확한 지식이 나올 수 있겠는가. 다만 한국 영화산업과 문화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거기서 영진위의 위상과 역할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기 영진위는 그 운영과정에서 다소간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하였으나 제작자본의 안정화라는 큰 방향에서는 옳았으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2기 영진위는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 영화산업 및 문화의 현주소에 대한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현재 한국 영화산업과 문화의 특징 몇 가지만 간략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먼저, 한국 산업 구조의 유사 할리우드화 경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몇 가지 특징으로 드러난다. 첫째, 소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장르의 등장이다. 이는 단순히 스펙타클이 강조되는 최근의 몇몇 대작의 등장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인 제작비의 비약적인 상승, 그리고 이를 상회하는 광고비(PA)의 상승이라는 경향을 지칭한다.

둘째,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의 등장이다. 시네마서비스, CJ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픽쳐스와 같은 두 세개의 메이저 투자·배급사가 한국 영화점유율의 80% 이상을 상회하는 현상은 영화의 흥행에 있어 제작보다 오히려 배급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와이드 릴리즈 배급방식의 등장이다. 이러한 배급방식의 등장은 스크린 점유에 있어 독점화 경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다음으로 이상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한국 영화산업의 구도를 빈익빈 부익부로 몰아가고 있다. 한 해 60편이 넘는 영화들 중 손익 분기를 넘기는 영화가 10편 내외에 불과하고, 그나마 이익의 대부분은 상위 대여섯 편이 가져가고 있다. 이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장기적으로 한국 영화의 제작 풍토는 시장에서 승부를 낼 수 있는 대작 중심의 20∼30편대로 줄어들 것이다. 즉 제작비는 더더욱 상승하고, 편수는 줄어들 것이다. 이는 두 가지 큰 문제를 발생시킬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개별 영화들의 손익분기점이 올라가 국내 상영관에서의 수익만으로는 손익분기를 맞추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시장 확장에 대한 요구로 나타날 것이며, 나아가 다양성의 위기로 귀결될 것이다. 2001년 소위 '와라나고'(<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현상은 이러한 위기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세 번째는 현장 영화인력들의 전문성의 위기이다.

2001년 봄 이후 현장 영화인력들의 처우 개선이 한국 영화계의 화두가 된 바 있다. 문제는 현장 영화인력들의 처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열악한 처우로 인해 인력의 전문성이 전혀 높아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영화인력의 공급과 교육 및 재교육의 역할을 하던 도제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이와 같은 전문성의 위기는 더욱 커지고 있다.

네 번째, 매체 융합의 경향이다.
이제는 영화가 영화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게임, 음반, 소설,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나 유통 경로를 거치면서 부가가치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영화의 본질 자체가 변화를 겪고 있다. 10-20년 뒤 영화의 모습이 어떠할 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다섯 번째로 한국 영화산업의 호황은 산업 주체들이 정책적 개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다. 불과 2년 전 1기 영진위가 제작자본의 안정화를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던 점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2기 영진위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기본 원칙은 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아니라 시장의 폐해를 보완하며, 시장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원칙 하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사람을 키우자

영화산업은 무엇보다 개개인의 창의력과 전문성, 기술이 요구되는 소위 지식산업 분야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인력 양성시스템은 산업 현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전문인력을 전혀 양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매년 수십 개의 영상관련 학과와 민간 교육기관에서 수백 명의 영화인력들이 새롭게 배출되지만, 대부분 아마추어를 갓 벗어난 영화 애호가들이거나 감독 지망생들이다. 요컨대 촬영, 조명, 미술, 제작 등 기술 영역의 현장인력은 물론이고, 국제교류나 통상전문가, 법률 전문가, 조사 전문가는 거의 배출되지 못하고 있으며, 배출할 만한 역량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영진위는 영화아카데미를 통해 영화 감독 지망생들을 배출함으로써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기 영진위는 특정 분야의 고도의 전문가를 키우는데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특히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몰락해 가는 도제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전문화된 현장영화인력을 육성하는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2) 다양한 관객을 만들자

이는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신장시키기 위한 제안이다. 2001년 다양성의 위기가 한국영화계의 화두가 되면서, 2002년 영진위 사업에는 예술영화 전용관과 시네마 떼크에 대한 지원과 같은 다양성 신장을 위한 정책이 입안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물론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영진위는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정책의 최종 목적이 다양한 영화들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의 역량을 키우는 것(즉 시장을 두텁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양한 영화의 상영을 보장하는 배급망의 확보 뿐 아니라 관객을 교육하고, 자발적인 관객운동을 촉발할 수 있는 관객 견인 정책을 펼쳐야 하리라 본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필자는 초·중·고교 교과과정에서 영상물을 읽고 감상하는 교육, 그 예술성을 인식하는 교육을 제도화하는 것이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3) 참여적 영화 문화를 만들자

영상 기술의 발전,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영화의 텍스트성 뿐 아니라 그 제작과 배급 방식을 바꾸어놓고 있다. 특히 값싸고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를 통한 비선형 편집 시스템의 등장은 전통적으로 집단작업으로 인식되던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개인적인 표현의 수단으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느 면에서는 상당부분 실현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수동적인 감상의 문화였던 영화문화를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만들기의 문화로 바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디지털 카메라의 조작법과 편집기법을 교육하고, 스스로 만든 작품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인력들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영진위 역시 이러한 흐름을 인식하고, 2001년 하반기에 기본적인 영상기술을 교육하고, 인력을 양성하며, 기자재를 대여하는 기능을 가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미디어 센터를 개관한 바 있다. 2기 영진위는 이러한 정책을 확대해야할 것인데, 특히 입안되어 있는 <미디어 센터 설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전국적으로 미디어 센터를 보급하는데 힘써야할 것이다.

(4) 지식과 정보 및 기술 축적의 토대를 만들자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통합 전산망 사업의 지연으로 제대로된 흥행 통계가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흥행 수익의 제작자본으로의 재유입 과정에서 누수를 발생시키는 큰 문제 외에도 영화 산업과 정책 연구에 있어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도대체 현장 영화인력의 규모가 몇 명이나 되는지, 그 중 몇 명이 취업상태에 있으며 이들의 경력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 역시 전무하며, 해외 산업 및 기술 발전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전달해 줄 전문가도 시스템도 없고, 제작사와 극장의 경영정보, 제작에 대한 정보, 현상소, 편집실 등의 현황과 경영정보 등 국내의 산업 현장에 대한 정보 역시 전무하다.

비단 산업 영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 이론에 있어서도 영화학회지 외에는 제대로 된 전문 학술지가 없으며, 연구자들은 각종 대중 저널들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시간강사로 생계를 연명하는 처지에 놓여 있어 안정된 연구환경이 절실한 상황이다.

따라서 2기 영진위는 지식과 정보 및 기술 축적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들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 ①통합전산망의 실현, ②영화인력 데이터베이스 구축, ③영진위 내 영화정책 연구실의 영화 이론가, 조사전문가, 정책 및 산업 연구원들을 대거 확충한 한국영화 연구소로 확대 개편.

(5) 통합 시청각 정책으로의 전환을 준비하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화와 방송, 게임, 애니메이션, 음반, 소설, 만화 등의 인접 장르들이 상호 융합됨에 따라 이들을 통합하여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매체 및 장르들은 각 분야별로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인력 수급구조와 법규, 진흥기구들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2기 영진위는 각 장르들의 벽을 허물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방송과의 상시적인 협의테이블을 마련하여 통합 시청각 정책 실현을 위한 예비 주체를 마련해야 한다.

이상을 통해 2기 영진위가 처한 상황과 해야할 일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정책들을 실현할 수 있는 재원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영진위는 2003년까지 1500억 원의 예산을 마련해 놓고 있다. 하지만 2003년 이후 예산 충원 계획이 없어 원금 보전의 부담에 시달리는 영진위로서는 모처럼 마련된 예산조차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지원금의 50% 이상이 원금 손상이 없는 융자사업에 치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2기 영진위가 집중해야 할 인프라 구축과 문화적 지원 정책에는 융자 방식의 지원이 아닌 소진성 예산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2003년 이후 영화진흥 기금 충원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영진위가 소신껏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조준형 / 영화인회의 정책실장 zeitsein@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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