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19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친일파였던 한 시인은 '해방이 그렇게 빨리 될지 몰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도 '해방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는 말을 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해방이후 자신들이 나가고자 하는 방향은 달랐을 테지만 일단은 해방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는 느낌은 공통적이었다. 어쨌든 해방을 맞아 모두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친일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과를 덜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 고민의 결과는 첫째, 근신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둘째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정당을 만드는 것이니 한민당이 그 결과물이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15만원의 정치자금을 지원하였다. 물론 임정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귀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백만 원을 만들어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한민당이 이처럼 이승만과 임정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한 것은 해방 후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세번째 방법은 재산의 일부를 정치조직이나 개인에게 주는 것이니 해방이 되고 본격적인 건국사업을 진행하던 건국준비위원회 건물이나 김구가 45년 11월 환국한 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한 경교장, 이승만의 돈암장 등이 그것이다.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별장이었다. 위치는 지금의 강북삼성병원이다. 1938년 완공 당시 그 일대가 죽첨정(竹添町)이어서 건물 이름이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최창학은 일제 하 삼성금광을 소유하고 임전보국단 간부를 지냈는데 친일행위를 뉘우친다면서 김구에게 헌납하였다. 물론 김구가 죽은 후에는 다시 최창학의 소유가 되었다.
이승만은 45년 10월 16일 환국하고는 조선호텔에 며칠 묵었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 정치기반도 없었지만 경제적 기반도 없는 상태였으니 호텔에서 마냥 지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자 한민당이 주선하여 당시 서울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던 장진영이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이곳을 돈암동 인근에 있다고 하여 돈암장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승만과 미군정간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하니 할 수 없이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이후 마포쪽으로 일시 옮겼다가 우익들이 돈을 모아 이화장을 지어 이승만에게 기증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48년 경무대로 이사할 때까지 생활한다.
친일파들에게 해방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쪽으로는 잘못을 뉘우친다며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고 그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돌려받았다. 물론 다른 한쪽으로는 적극적인 친미와 반공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자 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금창영 /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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