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복(노동자의 힘 노동위원장)
전쟁과 노동자 파업투쟁의 발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 3년 '한국전쟁'은 바로 거대한 계급투쟁이었다. 전쟁 3년이라는 시간적 공간과 한반도의 지역공간 안에서 '전쟁과 혁명'이 갖는 모든 세계적 경험이 한 시간과 공간 속에 집중된 시기였다. 국내 계급투쟁에서도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의 도정에서 일제하 최초의 좌우 연합 전술로 출발했던 신간회가 해산 된 이후 본격화된 좌우대립 투쟁의 최종적 결말이었다.
3년 간의 전쟁중 주요 전선은 발발 즉시 낙동강으로, 그 후 유엔군의 인천 상륙과 압록강까지 전선이 올라갔으며, 다시 중국의 참전으로 서울이남으로 급격히 내려오고 또 서울이북으로 이동하면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가 전장이었다. 이러한 '동적인 상황과 공간' 내에서 반공우익에 의한 학살, 지주·소작착취관계 청산을 위한 계급투쟁과 친일 관료·지주·자본가 등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 집행되었고 이에 대한 보복이 상호 반복되었다.
전쟁의 양상 역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를 축으로 한 진영간 국제전이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유격 게릴라 투쟁이 포함된 전면전이었으며, 네이팜탄 등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생산된 신무기와 신전술, 심지어 세균전의 실험장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도 국내 정치전선에서는 정치깡패와 경찰에 의한 국회의원 구금과 체포, 협박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정계개편 역시 추진되어 전쟁 공간을 활용하면서 이승만 체제가 새롭게 구축된다.
50년대 전후사를 성격 지우는 복잡한 사태가 실타래로 얽힌 짧고도 굵은 3년, 복잡한 성격의 혼합과 계급투쟁의 다양한 측면이 어우러진 조건하에서도 노동운동은 지속되었으며, 전쟁상황이라는 극단적 조건아래서도 노동자 파업투쟁은 지속되었다.
전쟁기 노동운동의 기본적 조건과 성격
가장먼저 제기되어야 할 점은 이 시기가 노동운동이 '없었던 시기'(부재의 시기-박현채)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며, 해방 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45년 11월 5일 결성) 조직이 미군정-이승만 정권-대한노총으로 변신한 우익청년단의 탄압과 전쟁이라는 조건에 의해 '중단' 되었으며, 전쟁의 와중에 새로운 세력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즉 전후사의 새 출발의 맹아로서 '새로운 노동운동의 출발'(장명국)도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전평 붕괴, 대한노총의 탄압과 내부대립이라는 상급조직 상황과는 별도로 해서 노동쟁의를 억제하는 전쟁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 식량배급요구 등 노동자 생존권요구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중의 파업투쟁은 지속되었다. 부재의 시기가 아니라 해방 후 노동운동의 진전이 한국전쟁에서도 지속되었던 시기이며, 역사가 연속되었던 시기인 것이다.
50년대를 통틀어 볼 때 쟁의 건수에 있어서 그렇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목표에 있어서도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쟁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생존권 사수를 위한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급 요구 등의 경제적 요구에 한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승만 정부의 불법 선거 항의, 전쟁반대, 미군의 노동자 학살 항의 등 정치투쟁까지 의연히 자신들의 투쟁을 확대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김양제).
또 산업별로 보아도 부두, 광산노동자에서부터 전기산업, 방직산업에 이르기까지 지역적으로도 경기도 부산 강원도 등 전산업 전지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4.19직전인 59년을 예외로 한다면 50년대 노동쟁의 평균건수를 크게 밑돌지 않는다.
두 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이 전쟁기 동안에 그 동안 우익 반공을 표방해 오며 전평 파괴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 46년 3월10일 결성, 48년 8월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칭)이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로 보다 축소되고 수직계열화 되어 50년대 노동자통제와 이승만 체제 방어조직이자 자유당의 하부기관으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대한노총은 전평처럼 이미 조직된 전국적 산별 단일노조를 기반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지방 노동조합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우익민족진영의 청년단체 및 정당관계 인사들에 의해 상층 지도부만 먼저 조직된 것이다. 대한노총은 산별 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전평 산하 산별노조를 파괴하고 주요 간부활동가를 공장에서 몰아내고, 우익 청년들을 공장과 기업에 취업시키면서 조직을 구축하였다.(물론 이들은 조직건설투쟁과 반공투쟁을 일치시키고 있다.) 대한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일명 독청)내에서 대한노총 건설을 내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초대위원장 전진한(대한노총 후보로 국회의원 출마하여 당선, 48년 이승만 단독정부하에 초대 사회부장관)은 청년시대 일본에서의 체험한 '협동조합운동 경험'을 살려 46년 헌법제정 당시 헌법에 노동기본권과 소득재분배제도의 구현을 위한 법적 기초로서 이익균점권 조항 삽입, 귀속재산 처리법 심의 시엔 귀속재산 매각시 그 사업체의 노동자 대표기관인 종업원조합에 우선으로 매각하도록 하는 수정안 통과 등의 노력을 해왔다. 그는 이런 자신의 활동을 바탕으로 전쟁기에 대한노총을 서구식 자본주의하의 노동조합으로 탈바꿈하려는 작업을 시도했다(김낙중, 나까오 미찌꼬). 이는 당시 내각책임제를 거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채용하려는 이승만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전쟁기간내의 정계개편을 도모하면서 조방쟁의를 계기로 대한노총에 출세파를 동원해 전진한파를 몰아낸다. 이로서 대한노총은 '반공노동자운동'의 기지에서 자유당의 외곽 지원단체로 50년대 노동운동 통제단체로 전락하여 4.19 혁명시기까지 수명을 연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쟁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방직쟁의, 광산 및 부두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직면하게된 지배체제 일각(국회-전진한 발의)에서는 노동운동에 대해 무력 탄압으로 일관하는 이승만 정권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며 노동자 투쟁에 대한 '방어 입법'을 서두른다. 그리하여 노동조합법(53년 1월23일), 노동위원회법(1월27일), 노동쟁의조정법(1월30일), 근로기준법(53년4월15일)등 노동관계 4법이 제정된다. 물론 이 법들 제정의 핵심적 계기는 나중에 살펴볼 '조선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때문이었다. 또 노동관계법이 갖는 보호적 성격을 감안할 때 이는 남한 단독정부수립, 한국전쟁기에도 멈추지 않는 노동자들의 투쟁결과로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입법과정에서 당시 노동운동에서 의미가 컸던 노동자의 '이익분배균점권'은 구체적인 법률로 제정되지 못하였으며(이 조항은 5.16이후 제3공화국 헌법에서 완전 삭제됨) 전시하의 급박한 대응 필요에 따라 법제정기술상 요구되는 충분한 기초연구·조사를 거치지 못한 채 맥아더 군정 하에 제정된 일본 노동관계법을 모방하여 제정했기 때문에 이후 법 해석과 법 집행 상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는 근거가 되었다(신인령).
노동관계법 제정에 의해 노동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측면(노동운동의 활성화)은 50년대 대한노총의 대정부 호응성(불러서 응한다. accountability) 전략으로 통제·관리되고(조돈문), 그나마 투쟁도 합법적 통로를 따라 온건한 방법으로 이끌어지는 '50년대 노사관계'가 정착된다.
[한국노총 50년사]의 낯설음
한국노동조합운동사(79년 10월 발행)가 한국노총에서 발행된 후 [한국노총 50년사](2002년 3월 10일)가 다시 발행되었다. 한국노총조합운동사가 발행된 직후 10.26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새로운 정치국면이 조성되고 노동운동은 급격히 분출되었다. '1980년 봄'의 노동운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 투쟁의 주요한 목표 중에 하나가 1970년대 자신의 민주노조 운동을 압살해 왔던 한국노총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50년사'는 70년대 민주노조의 투쟁, 80년 봄의 노동운동을 자신의 운동사의 한편으로 많은 사진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투쟁의 족적을 드러내는 운동사 사진철에 붙어있는 많은 투쟁사진을 '한국노총 50년사'에서 보면서 너무 낯설고 당황스럽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20년 전에 자신이 발행한 '한국노동조합운동사'와 비교해 보아도 전평의 역사를 지나치게 축소 한 것이야 이해 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한국전쟁기의 노동운동'을 한국노동조합운동사와 비교해도 철저히 배제해 버렸다. 70년대 '긴급조치'하라는 사상통제아래서 발행한 과거 자신의 저서마저도 스스로 외면해 버린 것이다. 남북노동자교류의 한 당사자로서 나서고 있는 한국노총이 소위 '남북화해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때에 오히려 '전쟁기의 노동운동'에 대해 스스로 축소해 버리는 이유는 정녕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
해명을 서둘러야할 전쟁기 우리의 노동운동
북노당의 투쟁전술에 동의하지 않은 많은 전평 산하 현장활동가들은 전평 붕괴 후 전쟁기 동안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가. 우익 반공 청년 테러단과 군인들에게 학살을 모면한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을 어떻게 이끌어가고자 했는가. 전쟁 전 노동운동의 지도력이 전쟁 중 전개된 파업투쟁 사례에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대중투쟁은 단절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전쟁중 노동운동에서 반전평화 대중운동의 전개는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대중의 자발적 투쟁이고 어떤 투쟁이 전쟁전 북조선의 교시에 의한 투쟁인가. 노동운동에 편입되어야 할 '전쟁 중 강제 징발된 노동자들의 도주사건'의 실정 등 과제는 끝이 없다.
이제 전후세대 활동가에게 있어 전쟁 중 노동자 파업투쟁과 기록은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역사와 기록이 오늘날 노동운동 대중이 가야할 길을 돌고 돌게 하지 않으려면 '운동의 역사와 기록'이 스스로 남김없이 말하게 해야 한다.
□ 참고 문헌
김낙중 1982 한국노동운동사(해방후) 청사.
나까오 미찌꼬 1991 [5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분기점] <역사비평 12>.
조돈문 1996 [50년대 노동계급의 계급해체] <경제와 사회 봄>.
박현채 1980 [해방후 한국노동쟁의의 원인과 대책] 김윤환 외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광민사.
장명국 1985 [해방후 한국노동운동의 발자취] 김금수 외 {한국노동운동론 1} 미래사.
김양제 1992 [8.15 해방이후 남조선에서의 노동운동] 안병욱 편 [한국사회운동의 새로운 인식1} 대동.
□ 한국전쟁기 노동자 파업 투쟁
시기/사업장/참가인원/요구사항/기타
51년9월/인천부두노동자//노임 및 조합비과잉징수
51년11월/인천부두노동자/1만여명/임금5할, 식량배급/미군상대파업, 요구관철
51년11월/부산부두노동자//부산중앙부두 소각, 군수물자 소각, 대사관방화, 병기창폭파
52년1월/부산조선방직/3천여명/임금인상, 노동자폭압반대, 사장퇴진/국회앞 시위투쟁
52년2월하순/진해미군제55보급회/1천5백/임금인상, 전쟁물자 하역반대
52년2월/영월,도계,장성,은성,화순 등 광산//체불임금, 식량대책
52년2월/상동,하천 광산노조//노임지불 방법개선
52년3월/부산조선방직/전체노동자/재파업/1,343개 직조기, 109대 정방기 운전 완전정지
52년3월/조선전업노조//미불노임요구
52년3월/철도노조//식량배급개선, 노동시간단축
52년4월/주안염전노동자//임금 50%인상
52년4월말/영월탄광노동자//임금인상, 체불노임, 식량배급/영월화력발전소 석탄공급중단
52년4월/대구관영기업공장폭파
52년7월(19일,29일)/부산부두노동자/3만/전쟁물자하역거부 불법성 규탄/대통령선거
53년2월/부산부두노동자/1천여명/미군 조선노동자 학살 항의파업/미군사시설과 기관들 파괴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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