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규제가 아닌 자율 규제를 모색하는 유럽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매체보다 탈중심적이며 탈규제적이라는 인터넷. 인터넷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주제는 인터넷내용등급제에 대한 것이었다. <네트워커>는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다른 나라의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을 검토하

[네트워커 편집자말]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매체보다 탈중심적이며 탈규제적이라는 인터넷. 인터넷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주제는 인터넷내용등급제에 대한 것이었다. 원래 인터넷내용등급제는 픽스(PICS)라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내용분류시스템이지만, 한국에서는 지난 2000년 정부가 직접 청소년유해매체물을 대상으로 인터넷내용등급제를 시행하겠다고 나서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반대자들은 인터넷내용등급제의 핵심 문제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존재를 지적하고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 인터넷내용등급제가 설득력이 있는 이유도 역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라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같은 국가 차원의 인터넷 내용규제 기구가 어째서 필요한 것일까? <네트워커>는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다른 나라의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을 검토하면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넘어서는 이 시대의 상상력을 북돋아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의 필자는 현재 런던대학에서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을 연구하는 김유승님이다.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유럽
2. 미국
3. 호주
4. 연재를 마치며


국가 규제가 아닌 자율 규제를 모색하는 유럽
'인터넷내용등급제'에 대한 논의가 많이 발달되어 있는 유럽의 경우, 국가의 역할은 '불법정보'를 규제하는 최소한도로 그친다. '자율규제'를 모토로 하는 유럽의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은 90년대 중반부터 모색되었다.
1995년과 1996년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인터넷상의 내용에 대한 자율규제단체가 조직되고 이들 단체들이 인터넷상에서의 불법정보-특히 아동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신고센터인 '핫라인'(Hotline)을 운영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형태의 단체들이 속속 생겨난다. 이들 대부분의 단체들은 인적구성이나 재정적인 면에서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고, 다만 불법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사법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관이 영국의 인터넷내용 자율규제단체인 인터넷감시재단(The Internet Watch Foundation, IWF. http://www.iwf.org.uk)이다.
1996년 8월, 영국의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들은 경찰로부터 불법 포르노그라피 혐의를 받고 있는 133개의 뉴스그룹의 명단이 적혀 있는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는 어떠한 법적 제재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들은 스스로를 법적분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IWF이다. IWF는 출범과 함께 "알쓰리 안전네트워크(R3 Safety-Net)"의 구상을 발표하는데 여기서의 세가지 원칙(Responsibility, Rating, Reporting)은 이후 유럽의 내용규제정책의 기초가 된다.
유럽식 인터넷내용규제정책은 인터넷산업체의 자율규제를 기반으로 정부가 참여하는 공동규제(Co-operative Regulation)라 할 수 있다. 1999년 9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인터넷내용회담(Internet Content Summit)에서 재확인된 이 규제 모델은 인터넷산업, 내용등급시스템, 핫라인, 정부, 그리고 사용자라는 다섯 가지의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인터넷 산업체는 내용등급시스템과 핫라인을 지원 운영하고, 정부는 민간 핫라인과 연계하여 불법정보에 대한 법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용자 스스로의 자율성을 높이는 미디어 운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공동규제모델은 유럽연합에서도 받아들여져, 1999년 유럽연합은 인터넷 기업체들의 자율규제와 규약제정, 민간 핫라인 연합체의 결성, 유럽 인들을 위한 내용차단선별시스템의 개발을 목표로 하는 "인터넷 이용을 증진하기 위한 행동 계획(Action Plan for Promoting Use of the Internet)"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연합의 강력한 후원과 영국 IWF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같은 해 유럽 각국의 인터넷 핫라인의 연합체인 INHOPE(The Internet Hotline Providers in Europe)와 국제적 인터넷내용등급시스템을 지향하는 ICRA(The Internet Content Rating Association)가 출범하게 된다.


유럽의 인터넷내용등급제가 정통윤의 등급제와 다른 점
IWF를 비롯한 유럽의 자율규제단체들은 언뜻 우리의 정통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유럽의 자율규제 단체들과 정통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유럽의 인터넷내용등급제는 한국의 인터넷내용규제정책과 근본적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첫째, 인터넷내용규제정책에서의 정부의 역할이 다르다. 다중적, 분산적 매체인 인터넷에서 과도한 정부의 간섭과 규제는 옮고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효율성의 면에서 많은 의문을 낳고 있다. 특히 내용규제에서의 정부의 과도한 권한은 국가검열의 문제를 낳고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유럽의 인터넷내용규제정책에서 정부는 그 역할을 최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나날이 그 몸집을 불려나가는 정통윤을 보면 우리 정부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정통윤이 스스로를 민간기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모든 재정을 정부가 지원하고 정부가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는 조직을 어떻게 민간기구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둘째, 내용등급시스템의 자율성이다. 유럽연합을 비롯해 유럽의 각국에서 인터넷상에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기술적 대안으로서 내용등급시스템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느 정부도 내용등급시스템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있지 않으며, 더구나 정부가 스스로 내용등급시스템을 운영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ICRA가 그러하듯 인터넷내용등급시스템은 정보제공자나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전체 인터넷상의 사이트 수에 비례한 등급을 단 사이트의 수가 임계치를 넘어야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등급시스템의 속성상 특정 사이트들에만 등급을 강제한다고 해서 그 시스템이 제구실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이에 대해 형사처벌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과도한 정부규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무엇이 불법, 유해정보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유럽의 인터넷내용규제단체들이 각국의 법에 근거하여 불법정보를 규제하고, 유해하다고 판단되지만 합법적인 정보들은 사용자들의 자율적 선택에 맡기고 있다. 정보의 불법, 유해성에 관한 판단을 규제단체 스스로 재단하는 일은 결코 없다. 반면 정통윤은 해마다 수만 건에 달하는 청소년유해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고 발표를 하는데, 어떠한 기술과 기준으로 유해성을 판단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김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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