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안 mulu@kdlpnews.org
“광화문은 이미 붉은악마가 점령했는데, 시끄러워서 취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조선일보의 위장폐업 철회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조선일보사 근처에서 상경투쟁 13주째를 넘기고 있는 조광출판인쇄노조의 투쟁현장을 취재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정영환 위원장은 이렇게 걱정했다.
마침 그날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열리는 18일. 경기 시작 5시간 전인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광화문은 정 위원장의 말처럼 이미 붉은 물결로 뒤덮여있었다.
‘월드컵 비트’를 타고 여기저기에서 뿜어나오는 ‘대~한민국’의 열기.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덕수궁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가던 기자는 ‘Stop union Repression! No Chosun-ilbo’라고 적힌 가슴 띠를 두른 채 막대풍선을 불고 있는 조광노조원 김원배(43)씨를 만날 수 있었다. 김씨는 그렇게 신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응원은 해야겠어서 풍선을 불고 있긴 하지만, 월드컵 열기에 가려 우리 문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건 모든 노조원들이 똑같이 느끼는 감정일 터. 언론노조의 플랭카드가 내걸린 서울시의회 앞 노숙투쟁 현장에 모여있던 8명의 노조원들도 “조선일보사의 부도덕성과 시민들의 무관심뿐 아니라 월드컵 열기와도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같이 어울리면서 환호할 수 없는 형편이 아쉽죠. 자기희생이 따르는 모임에 이 정도 군중이 모이면 세상도 바꿀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있어요.” 유상현 부위원장의 말.
김선조 조직부장은 당장 오늘 ‘잠자리’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는다. “저기 보이죠? 둥그런 축구공 모양의 조형물이요. 콘크리트 찬바닥이긴 하지만 저 아래가 우리의 잠자리인데 오늘은 붉은악마들에게 먼저 점거 당할 것 같아 이만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힘든 건 이뿐이 아니다. 평균 연령 40대에 모두 기혼자인 이들은 가족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정 위원장은 “집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이기고 오라”는 아내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핑 돌고, 김 부장은 네살배기 아들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다.
“이래저래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조선일보의 부도덕성을 시민들에게 알려낼 수 있다면 이 정도 고생쯤이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3월18일 상경투쟁을 결의했을 때, 우리 조합원들 모두 1년 작정하고 올라왔어요. 광주로 돌아가서는 안티조선운동도 벌일 예정이구요. 비록 12명이라는 적은 인원이 2교대로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정영환 위원장의 말에 조합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92년 전국동시인쇄의 기치를 내걸고 설립된 조선일보 광주공장 조광출판인쇄가 느닷없이 회사폐업을 단행한 것은 지난 3월. 광주공장을 증설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해왔으면서도 느닷없이 직장폐쇄를 단행한 데는 노조원들을 전부 해고한 뒤 나중에 새 회사를 만들 때 무노조 상황으로 끌고 가겠다는 조선일보 측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런 방침이 발표되자 전체 직원 32명 가운데 비노조원인 19명은 희망퇴직을 했고 나머지 13명은 집단해고를 당한 것.
노조는 즉시 조선일보의 조치를 ‘위장폐업’이자 ‘노조와해 음모’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생존권 수호투쟁에 나섰다. 거리에 내몰린 힘없는 노동자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우리는 노조가 없던 지난 10년동안 장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비인간적인 대우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도 조선일보 자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1등신문이라는 조선일보가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태를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회사측 관계자는 폐업 직전 노조원들에게 “방상훈 사장을 설득해보라”고 말해 해고 배후에 조선일보 최고경영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측은 조광인쇄출판노조가 자회사가 아니라며 계속 발뺌하고 있는 상황. 조광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국장급 이상 간부 전원이 모두 조선일보 출신인데다가 조광의 공식 재무제표에도 수억원이 ‘광주인쇄공장 증설자금’이란 항목으로 책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변명은 궁색할 따름이다.
“정동별관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면 조선일보 경비가 화장실 사용도 못하게 해요. 그보다 더 기막힌 건 조선일보 노조가 조광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성명서 한 장 내놓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언론노조 소속일 텐데….”
그래도 시민들이 관심을 보일 때면 12명 조합원들은 다시 힘이 솟는다. “노숙투쟁으로는 조선일보가 꿈쩍도 안 한다”며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해 주는 시민들도 있고 방상훈 사주의 집 앞에서 1인 시위를 펼치는 날에는 직접 만든 피켓을 ‘배달’해주는 시민도 있다.
실제로 기자가 이들을 취재하던 동안에도 박카스와 녹용엑기스를 건네며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는 시민 몇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정영환 위원장도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투쟁수위를 높일 계획. 광화문 서울시의회 앞에서는 조만간 삭발이나 단식, 상복투쟁을 벌이는 이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 93호] 6.24 ~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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