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뜨거운 열기 속에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48년 동안 월드컵에서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한국 축구가 16강을 넘어 8강, 4강으로 승승장구하는 장면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짜릿한 감동과 흥분이 솟구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8강전이 열리던 22일에는 전국적으로 500만의 인파가 거리응원에 나섰다니,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가슴 졸이며 한국 축구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 속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에 이어 둘째 아들 김홍업이 권력형 부패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이미 김영삼 정권 시절 김현철의 구속이라는 경험이 있었는데도 또다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이 둘이나 구속될 만큼 권력을 중심으로 한 부정부패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 민중을 우롱하고 있다.
그러나 월드컵의 열기에 가려 대통령의 사과 성명 한마디로 이 엄청난 사태는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한강대교 고공농성을 벌인 데 이어 지난 12일부터 노사정위원회를 점거하고 58명이 집단 단식투쟁을 벌이던 시그네틱스 조합원들은 21일 눈물을 머금고 투쟁을 마무리해야 했다.
장기간의 투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가운데 전개된 단식투쟁이었기에, 다수의 조합원들이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 나가는데도 월드컵의 광기에 가려 전혀 사회문제화 되지 않는 속에서 더 이상 투쟁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월드컵을 이유로 노점상들을 강제 철거하고,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을 체포하는 인권탄압이 자행되고 있지만, 월드컵의 광기에 빠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상황은 울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해물질을 다루다 혈액암으로 사망한 남편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라며 SK공장 앞에서 벌써 113일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해정씨는 SK회사측과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은폐 및 비호가 월드컵의 광기에 가려지는 현실을 비통하게 호소하고 있다.
자본의 숨막히는 탄압을 뚫고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효성노조 또한 월드컵의 광기 속에 지역 노동자들의 관심과 연대가 뚝 끊어져 버린 현실을 안타깝게 마주하고 있다.
월드컵에서 선전하는 한국축구를 지켜보는 일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월드컵의 열기로 인해 우리 노동자 민중의 삶이 후퇴하고 이 땅의 사회정의와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번 주가 지나면 월드컵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월드컵의 열기를 지배세력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에너지로 가져가려는 저들의 시도는 더욱 거세게 지속될 것이다.
월드컵은 즐기자. 즐거운 일이니까. 그러나 월드컵에 빠져드는 만큼 우리의 현실이 후퇴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함께 생각하며 이제 차분하게 월드컵 이후를 준비해 나가자.
즐거운 축제를 신나게 즐기면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지배세력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대응해 낼 수 있는 역량과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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