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향한 회상"-진보정치 운동사(16)]남한 노동운동에서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노동운동의 시발-학출 노동자와 서울노동운동연합(2)

김원/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85년 구로동맹파업(이하 연투)을 둘러싼 인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학출신(이하 학출) 노동자가 중심이 된 연투와 이후 전개된 정치적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연투를 통해 배출된 운동 주체들이 87년 이후 노조운동을 주도한 주체라는 점에서,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물질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지점은 연투와 서노련에 대한 ‘획일적인 평가’다. 당시에는 운동조직의 정당성의 논거로서 연투가 자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반면 이 시기 투쟁의 ‘과잉정치화’’를 주장하는 이면에는 노동운동의 ‘정치성’ 거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존재한다.

특히, 학출 노동자들의 개입이라는 문제를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로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 노동운동’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거세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정치성을 거세시키고, 그 자리에 조합주의적 실천을 새기려는 시도다. 이 글에서는 과거에 간과되던 노동운동에서 정치라는 문제와, 이 시기 나타났던 투쟁과 활동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구로동맹 파업의 의의와 전개
하나의 흐름? 다양한 흐름?


먼저, 80년대 초반 노동운동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자. 80년대 초반 운동 주체들은 70년대 노조운동을 기업별 노조하에서 소수 민주노조만의 협소한 경제적 투쟁에 제한했다. 그 결과 80년대 초반 국가의 탄압에 대해 ‘연대’ 보다는 개별 노조의 조직 보존에 급급했던 한계를 내포했다고 평가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할 움직임은 학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지역소모임이다. 이들은 ‘공단’을 실천 단위로 한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단사 차원이 아닌 공단내 ‘단일한’ 프로그램으로 공단 소모임을 운영한다.

하지만, 몇 몇 사업장의 경우, 학출은 집행부의 ‘안티세력’으로 존재하기도 했으며, 공단 전체 교육에 대한 조합간부의 평가 가운데에는, “교육시키라고 보냈더니 위원장 욕하는 것만 가르쳤다”는 식의 갈등도 존재했다. 또, 학출이었으나 지역정치소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연투를 경험한 한 증언자는, 당시 지역정치소모임 이외에 많은 소모임이 존재했으며, 노조 자체에 큰 의미를 둔 사업장도 상당히 존재했다고 전한다.

세번째로, 연투에 참여한 노조들의 특징은, 무엇보다 내부 써클 활동, 소식지 등의 일상적 활동을 통한 노조내부의 의사소통이 매우 활발했다는 점이다. 이는 공동교육, 공동숙박교육, 연합야유회 등을 통한 노조간의 일상적인 연대를 통해 가능하게 했다(<표> 참조).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연투의 평가다. 연투를 둘러싸고 2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 첫번째는 서노련의 평가로, 지역정치모임 및 소그룹 활동가의 적극적인 역할에 근거한 ‘전형적인 노학연대투쟁’이란 평가다.

이에 상반되는 평가는 연투의 기반은 외부 그룹이 아닌 ‘노조’였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소그룹 활동가의 계획에 따라 모든 파업이 주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 노동운동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이라는 서노련의 평가와 실제 연투가 소그룹의 지도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투쟁이라는 문제는 별개 문제다.

연투의 과정에서 소그룹과 지역정치모임이 구로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대투쟁을, 지역적 노동운동을 의도한 것은 사실이며, 초보적이나마 노동운동에서 ‘정치투쟁’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투가 본격적인 의미에서 정치투쟁이거나, 참여 조합원의 의식 수준과 지향을 정치투쟁으로, 연투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곤란하다. 연투 이후 정치투쟁론, 대중적 정치조직론 등은 당시 학출 활동가들에 의한 ‘하나의 평가’이지, 모든 이들의 평가는 아니었으며 실제 노동현장의 상황은 고립화 및 소수화 경향이 짙어져 갔다.

실제 서노련이라는 하나의 흐름과 동시에 존재하던 자생적인 노조의 움직임이 병존했던 것이며, 이는 연투 이후의 운동을 단일한 흐름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원인이다.


3. 서노련-80년대 분파운동의 모체

우선, 서노련은 기본노선으로, 노조만으로는 온전한 의미의 정치투쟁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위조직도, 대중조직도 아닌 서노련의 모호한 조직위상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두 번째, 정치-경제투쟁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서노련은 ‘정치투쟁=선도투쟁’으로 착각 받을 만한 실천을 전개했다. 이는 당시 서노련이 일종의 ‘정치투쟁에 대한 막연한 당위성’에 사로잡힌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세 번째로 변혁론에 있어서도 서노련은 ‘삼민론’이라는 모호한 변혁론을 제기했다. 이는 일종의 ‘노동자주의’의 변형된 형태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내부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선도투쟁과 분열의 시작

85년 연투 이후 개별 조합의 힘이 급격하게 떨어진 조건 아래에서도 출범한 서노련은 단사의 사정을 고려하기 보다, 공동지역연대투쟁을 고수하고, 이를 위한 선도적인 투쟁을 강조했다. 당시 서노련은 ‘생활임금의 쟁취’와 ‘3권 투쟁위원회’를 내세우고 지역가두투쟁을 조직한다.

하지만, 86년 대부분 임투는 몇 몇 사업장에서 선도적인 투쟁으로 일단락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3월 7일 정권과 사측의 탄압에 따른 신흥정밀 박영진 열사의 죽음으로 가리봉 5거리에서 대대적인 가투투쟁이 전개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86년에 들어서 서노련의 노조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취약했고, 서노련이 임투를 지도할 노조가 없는, 지역임투는 커녕 독자 임투가 가능한 단위사업장조차 부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개된 선도투와 소수에 의한 선전선동은 ‘목소리만이’ 휘날리고, 점거농성 등의 ‘선제공격’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서노련의 이중적 조직 질서와 분화

임투가 난항을 겪는 가운데, 공개지도부(상부)와 비공개지도부(하부)가 공존했던 서노련에서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문제는 조직 내부 민주주의의 결여였다.

당시 공개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한 증언자도, 당시의 위에서 내려오는 식의 지시가 일반적이었고, 일각에서는 “우리가 총알받인가”라는 식의 볼멘 소리가 튀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서노련 조직구조의 이중성은 양자 사이의 비공식적인 조절에 의해 유지되었지만, 86년 상반기 임투를 위한 가두투쟁에서 불거져 나온 상부의 하부에 대한 불만 제기, 선전부 안에서 불거져 나온 출처 불명의 원고들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 잇달았다.

특히 갈등은 서노련 비공개지도부에 변혁사상의 보급을 자임하는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개입하면서 심화된다. 하지만 이들 학생출신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은 일천했고, 활동 노선 역시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내환’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 이른바 ‘13인 모임’이다. 연투 이후 구속되었던 활동가들을 다수 포함, 서노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은 모였지만, 문제의 해결보다는 책임공방과 내부 문제점이 더욱 확장된다.

이러한 조직적 동요를 마감하고 서노련의 재건을 위해 86년 6월 29일 성문밖교회에서 구로동맹파업 1주년 기념집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집회장은 ‘서노련의 성토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간 내부 문건을 통해 물밑에서 전개되던 서노련에 대한 비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결국 재건을 위한 이 집회는 서노련의 ‘정치적 분화를 공개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공개 지도부를 이끌던 노동자 출신의 한 간부는 수기에서 서노련에 대해 ‘오도된 전위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바로 서노련이 내세웠던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란 모토는, 실제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정체성과 일상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닌, 계급이기주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투의 ‘적자’임을 자부했던 서노련에게 정치노선의 취약성은 정세에 대한 무력한 대응과 내부적인 분화로 이어진 것이다. 연투의 평가와 서노련의 실천은 생산현장에 기반하지 못한 노동운동에서의 정치가 좌절된 사례다.
[ 93호] 6.24 ~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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