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탁에서
어머니는 프라이팬째 볶음밥을 드신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기집애가 그게 무슨 꼴이냐!!"라고 호통이 떨어질 텐데. 당신의 딸내미는 공주처럼 우아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다.) 반찬통에 남은 밥을 넣고 대충 비벼드시기도 한다. 바닥에 남은 반찬을 누가 싹싹 다 집어 먹겠는가. 당연한 듯 버리게 될 것이다. 살림을 직접 하지 않는 자라면 아까울 것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반찬을 끼니 때마다 새 그릇에 덜어 먹기를 원하신다. "어~이. 반찬통 통째로 죄다 식탁에 늘어놓고 이게 뭐어야. 한 끼에 먹을 양만 그릇에 담아 오지." 물론 그릇에 조금씩 새로 담는다면 위생상 더 좋을 것도 같다. 침이 반찬통 전체에 섞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딱 한 끼니분 반찬 양은 누가 잴 것인가? 혹시 남았다면 다시 반찬통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약간 남았다면 다시 넣기도 애매하고 번거로워서 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릇에 묻은 양념만큼의 유기물과, 그 그릇을 씻었을 때 필요한 물과 세제, 그건 괜히 낭비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해서 추가되는 설거지는 누가 할 건데? 아버지가 할 것도 아니면서. 우아하고 깔끔하고 정갈하고 단아한 식사. 직접 차려봐!!
기생충처럼 냐금냐금 먹기만 하는 자들이 반찬을 사러 가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를 정리하는 수고로움을 알 리 없다. 반찬에 들어가는 채소와 생선과 고기와 양념의 값, 일년치 고춧가루와 참기름의 양, 요리와 설거지에 들어가는 물의 요금, 도시가스 요금, 쓰레기의 부피, 이런 것들이 생각날 리 없다. 설거지를 잠깐 하거나, 심부름을 한두 개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단편적인 수준에서 엄마를 '돕는' 사람도 잠깐 스치듯 생각할 뿐이지.
살림을 전체적으로 경험하고 통찰하고 모든 물질과 노동이 어디에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는지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득도'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는 '가정주부'들의 자기 가족의 건강만을 생각하는 좁고 이기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경멸하고, 한살림 같은 먹거리 운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정말은 엄마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어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까지 하는 사람이 남은 음식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음식을 그냥 '음식물덩어리'로만 보지 않고 인간 노동과 자연 에너지의 '결정체'로 보기 때문인 것처럼. 엄마들이 밥상에서 남은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을 때, 그리고 만든 지 오래 되어 상하기 시작했을 것 같은 반찬을 먹어치울 때, 우리는 그들을 비웃거나 그들의 늘어진 뱃살에 애도를 표할 뿐이지만, 애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헛똑똑이 우리들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아니 당연하게도?), 엄마들의 통찰력은 집 안의 총괄적인 살림에만 미치는 것 같다. 외식을 할 때면 아낌없이 음식을 남기고, 대중목욕탕에 가면 물을 펑펑 틀어놓으며, 독한 합성 세제를 풀어서 집안 청소를 말끔하게 하고 나면 그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나 물론,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2. 기숙사에서
지난 학기에 기숙사에서 살았다. 게으름뱅이인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생활에서 낭비되는 자원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샤워실에서 옷을 입고 벗을 때조차 물을 콸콸 틀어놓고 있거나, 수도꼭지를 꼭 잠그지 않아 밤새 물이 흘러나가는 일을 자주 보았다. 아래층 화장실 변기의 물이 며칠째 24시간 계속 내려가고 있는데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서 우연히 아래층에 가보았던 내가 경비 아저씨를 부르기도 했다. 기숙사 식당은 각자 식판에 담아 먹는 방식이었는데, 내 룸메이트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밥은 새 모이만큼 담으면서 반찬 욕심을 많아 그득그득 반찬을 담아 언제나 반찬의 2/3 정도를 남기곤 했다. 남긴 반찬을 내가 먹으면서 그애가 반찬 양을 조절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학기 중간에는 밤에 복도와 계단의 전등을 아무도 끄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20층짜리 대형 건물이어서 형광등이 수백 개였다), 자기 전에 층층마다 전등을 끄러 돌아다니면서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공공재는 낭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물자를 아끼게 하려면 일일이 요금을 물리거나 사유화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확실히 수도, 전기, 석유, 비닐봉지, 화장지 등은 그 본래의 가격보다 너무 낮은 가격이 매겨져있기는 한다. -미래 세대와 제3세계에 환경 부담을 미룬 결과 우리가 저 물자들을 부당하게 싸게 쓰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격을 올려도 부자들은 여전히 낭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만 워낙 아껴 쓰던 자원을 더 쪼들려 쓰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발적으로 아끼려는 마음 없이 비용 문제 때문에 아끼고 있었다면 낭비해도 좋을 기회가 올 때 마구 소비하게 될 것이 당연하다.
3. 작은 공동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공동체 이야기"(하나후사 료스케 지음, 이학선 옮김, 내일을 여는 책)라는 책이 있다. 일본의 유기농 공동체인 '후에로 마을'에서 어린이 농업 교실을 열어서 여러 가지 농사일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데, 그 중에 있던 닭잡기 프로그램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나오는 말.
"살아 있는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왜 그 일을 하는 것일까? 도살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소나 돼지를 죽인다. 왜 그런 일을 할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닭고기를 아무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런데 옛날부터,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차별하는 일이 많이 있었단다. 죽이는 일만 한다거나 참혹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심지어 요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테이크나 돈까스를 어기적어기적 먹어치운단 말이야. 싫은 일은 네가 해라, 나는 먹기만 하겠다, 이런 생각이지 뭐. 이런 사람들은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닭, 소, 돼지를 직접 잡아야 한다면, 그래서 고기와 도살을 분리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면, 원래 그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동물들이 가지고 있던 활기와 생명에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면, 별 생각 없이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적어도 고기를 덜 먹거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먹게 될 것 같다. 쌀 한 톨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직접 느끼거나 적어도 직접 농사짓는 사람과 접촉한다면 밥알 하나도 버리기 힘들 거다. 쌀 한 그릇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일년이 걸렸지만, 쌀 한 톨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역시 꼭 같은 일년이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음식을 요리하는 게 얼마나 잔손질이 많이 가는 노동인지 알게 된다면, 주기적으로 식사 당번을 해야 하는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되면 입맛에 좀 맞지 않다고 음식투정을 해대고 음식을 버리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물을 길어와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물을 직접 덥혀 목욕을 하는 상황을 경험하면, 쓰지도 않을 물을 펑펑 틀어놓는 일이 없어질 거다. 차마 안타깝고 아까워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을, 내가 모르는 어디선가 굴러 들어와서 내가 모르는 어떤 먼 쓰레기장이나 하수구나 해변에 버려질 즉물적인 물질덩어리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의 노동과 생명과 정성이 들어가 있는 존재로 보게 된다면, '쓰레기'라는 것은 거의 존재할 수도 없는 개념일 것이다.
4. 내 삶에 대한 통제력
내가 살림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무슨 뜻일까?
웃고 있는 귀여운 돼지 얼굴이 그려져 있는 소시지를 슈퍼마켓에서 집어들 때나, 파파이스에서 치킨 런(아니, 닭들이 농장을 탈출해서 기껏 파파이스로 뛰어들어왔단 말인가??) 세트를 고를 때, 나는 그 음식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무엇을 알고 있나.
내가 사먹는 이 햄버거에 소 몇 마리가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소들에게 무슨 사료를 먹였는지 알 수도 없고, 그 소들 중에서 병들어 죽은 소는 얼마나 있었는지, 심지어 소 말고 또 무엇이 들어갔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이 냅킨에 쓰인 종이가 어떤 울창하고 아름다운 삼림을 베어 넘기면서 만들어졌는지,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로 쫓겨났을지, 벌목 기계톱에 누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쓰레기 매립장이나 소각장은 안녕하신지, 매립장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쓰레기는 몇백 년 뒤에 분해되는지 알 수도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이 물은 수도꼭지를 통해서 등장하고, 화장실 바닥을 통해 퇴장하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하수구에 머리카락이 막혔을 때 쓰는 뻥뚜러가 다시 내가 먹는 물 속에 섞여 들어갈지 아닐지 역시 나는 모른다.
내가 오늘 산 옷을 누가 만들었을지, 그 노동자 소녀는 얼마나 어리고 얼마나 잠 안 오는 약을 먹어가며 밤샘을 하는지 얼마나 모욕과 학대를 당하는지 얼마나 월급을 떼이는지, 내가 직접 탐정이나 기자가 되어 기나긴 추적조사에 뛰어들지 않는 한 절대 알 수 없다.
연인에게 주려고 산 장미꽃에 농약과 속성재배약과 살충제를 얼마나 뿌렸으며, 그 꽃을 재배했을 지도 모르는 남미의 노동자의 손은 농약에 절어 마비되고 곱아 있는지 아닌지, 당연히 알 길이 없다.
친구에게 선물할 화장품에 색소와 인조향과 방부제와 알코올 말고 별 뾰족한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나, 화장품 가격에 억대 모델료와 광고비, 용기와 포장 가격을 뺀 진짜 값은 몇 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고? 하지만 토끼눈 자극 테스트(드레이즈 실험)를 거친 화장품이란 사실이 표시되어 있었다면 구입을 꺼리게 되지 않았을까?
집 장식을 위해 산 예쁜 열대어가 동남아 어느 해안에서 예닐곱살짜리 소년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잠수 때마다 오래 물 속에 머물게 하려는 고용주가 그 아이의 발목에 돌을 매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소부족에 시달리던 그 아이는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열대어를 살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모니터를 들여다보기 위해 사용하고 있을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기료는 어떻게 책정되고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우리가 전기에 의존하는 정도에 비해서 너무 아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
드럼통에 무슨무슨 폐기물을 담아 어느어느 뒷산에 파묻었다더라, 어느어느 갯벌에 부어버렸다더라, 어디서는 물고기가 떼로 둥둥 떠올랐다더라, 어느 나라에서는 무슨 누출사고로 몇 명이 죽었다더라, 광우병이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지고 있다더라,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를 협박해서 퇴직시켰다더라, 어느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식중독에 걸려서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더라, 손가락이 칼날에 잘려서 섞여 들어갔는데도 소시지 만드는 기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더라.....
내 삶과 살림에 대해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저 상품을 구입할까 말까, 저 티비 프로그램을 볼까 말까 하는 정도에 그친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으므로.
알 수 없는 이유로 건강이 계속 나빠지고 원인 불명의 스트레스로 마음이 피폐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살림을 직접 꾸릴 수밖에 없는 정도의 규모로 살림이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치하게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려는 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직접 경영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림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분업과 소비와 단절과 무기력을 넘어선 삶다운 삶... 그렇게 살림의 규모가 작아지는 대신 세상을 총괄적으로 관통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면, 지금의 살림꾼이 풀 코스 집안 살림을 연장시켜 더 넓은 범주에서 세상과 교류하는 모듬 살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득도겠지? 물질과 에너지와 가치와 시간과 노동과 사건을, 그것들이 생겨나고 움직이고 섞이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과정을 마음의 눈으로 꿰뚫는 현자.
그리고 아직 그런 작은 삶을 꾸릴 공동체를 만들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최대한 검소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다. 세상을 살리는 '살림'을 하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천리안을 가지는 준비 단계로. 그러면서 엄마들을 무식하고 무능하고 무례하고 '개념없고' 주책없는 악다구니가 아니라, 현명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 미래의 현자로 상상해볼 수 있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볼 때, 나는 단순히 노트북만이 아니라 이 노트북이 나오기 위해 일어났던 모든 과정과 앞으로 이 노트북을 구성하는 물질들에게 닥칠 미래까지 본다....(이영수의 '면세구역' 안의 "나비 전쟁"에서)
리건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