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시작되자 이 땅 언론은 모두 스포츠신문과 스포츠방송이 됐다. 월드컵 보도가 많은 것 자체를 나무라긴 어렵지만 지나친 보도는 '월드컵의 그늘'을 넓고 짙게 만들었다.
5월말부터 6월하순까지 10개 종합일간지의 노동관련 보도는 1백건을 넘지 못하고 그나마 3분의 1이 한겨레 기사였다. 한겨레조차 월드컵 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노동기사를 '배려'하거나 '사설', '왜냐면', '손석춘 여론읽기'로 채웠다.
5월22일∼24일 시작된 금속·보건·택시노조의 파업 가운데 상당수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됐지만 월드컵 보도에 묻혀버렸다. KBS 9시뉴스가 4일과 7일, 16일 잠깐 '곁눈질'해준 것말고는 장기파업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껐고, MBC도 경비업체인 캡스와 대규모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파업에 잠깐 눈길을 줬을 뿐이다. SBS는 더 심했다. 신문도 한겨레가 잊어버릴 만 하면 한번씩 다뤘을 뿐이었고, 열흘 넘는 단식농성을 벌인 한국시그네틱스, 포철고용특위, 천지, 일신 등 장기파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 여겼다.
'붉은 머리띠를 풀라'더니…
노동자 투쟁에 '붉은 칠' 하며 빨갱이가 하는 짓으로 몰던 보수언론들이 다룬 기사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지난해 민주노총 연대파업에 <붉은 머리띠를 풀어라>(2001.6.13)는 1면 머리기사로 '색깔공세'를 펴던 중앙일보가 붉은 악마의 응원장면을 다룬 <'길거리 응원'이 '레드 콤플렉스 날렸다'>(6.17)에서는 '붉은색이 공산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은 우스운 거라며 국민에게 열정과 단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썼다. 역시 1년전 칼럼 <정부를 '물'로 보는 사람들>(2001.6.15)에서 대한항공 조종사들에게 '파업을 하더라도 붉은 머리띠만은 두르지 마라. 붉은조끼 입고 조종하는 장면만 생각해도 끔찍하다'고 했던 동아일보가 이번에는 붉은색 찬양에 앞장섰다. 몇 년 전 <이규태 칼럼>에서 우리민족은 하얀 두건을 섰다며 붉은 머리띠를 풀라고 썼던 조선일보도 태도를 바꿔 이제는 붉은색을 아름다운 색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그래도 붉은색이 싫었던지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흰색으로 바꾸자고 한 동아일보 <'하얀 악마'라 불러다오>(6.20)는 말 그대로 희극이었다.
<어린이 노동실상 고발하러 온 인도소녀 소니아/“축구공만 죽어라 꿰매던 기억 끔찍”>(한겨레6.4) <월드컵이여, 어린이 노동에 빨간딱지를>(한겨레 '왜냐면' 6.13) <"아동들 중노동으로 '피버노바' 제작">(중앙 6.13) <"아동착취 산물 피버노바 사용말라" 美 하킨의원 주장…FIFA '사실무근'>(경향 6.8)은 축구공을 손으로 꿰매야 하는 어린이 노동문제를 다룬 기사였다. 하지만 중요하게 다뤄볼 만한 이 문제는 더는 찾기 어려웠다.
6.13지방선거도 월드컵에 밀려 찬반신세가 돼 낮은 투표율의 한 원인이 됐는데, 특히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제에 대해서는 단발성 기사나 다른 기사에서 언급하는 정도여서 진보정당에 유리한 제도의 홍보를 일부러 피한 것이란 비난을 받을 만 하다. 선거날 정상출근으로 대다수 직장인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문제제기는 한겨레, 국민, 동아, 문화가 다뤘으나 중요함에 비춰볼 때 미흡했다. 민주노동당 제3당 부상 소식은 조선, 중앙, 경향, 대한매일 등도 첫날부터 주목했다. 다음날 MBC 9시 뉴스데스크 <자민련 존립위기> 등 방송도 눈여겨 다뤘다.
그 와중에도 '편파보도정신'은 굳건히
월드컵에 치우쳐 노동보도를 외면하면서도 '편파보도정신'은 잃지 않았다. 6월초부터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와 관련 대다수 신문이 정부의 정이사국 진출 등 정부, 사용주 관련 소식을 단신으로 다뤘다. 하지만 노동관련 ILO 총회 소식은 한겨레 <'월드컵 화려함 뒤편 노동현실 알리겠다' / 국제자유노련, 캠페인 나서>(6.1) <국제자유노련(ICFTU), 한국 노동권침해 규탄, ILO총회 결의안 채택>(6.9)에서만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동아는 사설 <수업 않고 점거농성하다니>(5.30)를 내보내 전교조 저격수 노릇을 계속했고, 중앙은 <월드컵칼럼-국가 이미지의 승부>(6.2)에서 붉은띠를 문제삼고 '월드컵 때 파업 말라'고 훈계했으며, 조선은 <기자수첩-현대車의 '위기불감증'>(6.8)으로 파업을 매도했다.
반면 눈여겨 볼만한 것도 있었다. 새로운 토론문화로 자리잡은 한겨레 '왜냐면'은 보건의료파업, 한국시그네틱스 투쟁, 어린이노동 문제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빌어 다뤘다. 대한매일이 세 번에 걸쳐 내보낸 기획물 <밀려나는 생산직 근로자>와 <'비정규근로자 보호법' 토론/ "기간제근로 사유 제한을"> (6.8)은 평소 노동보도에서도 보기 드문 지면배치였다.
손낙구 |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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