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직전 만난 이호동 발전노조 위원장

[현장과 사람] 이호동 발전노조 위원장 "노동자 자존심만은 잃지 말아야죠"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향했다

그는 늘 차분하고 조용했다. 모두가 흥분해 큰 소리를 낼 때도, 그는 말을 아낄 줄 알았다. 준비가 필요한 시기와 행동이 필요한 시기를 알았고, 누구보다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동지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진격을 알리는 나팔소리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았다. 이호동 발전산업노조 위원장. 장대비가 온 서울을 뒤덮던 6월24일, 후덥지근한 명동성당의 천막 안에서 그를 만났다.

무엇보다 힘든 건 '외로움'

그는 "외로웠다"고 말했다. 38일의 파업, 그리고 이어진 1백21일의 천막농성 기간에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이었다. 순간순간 결단을 요구하는 위원장의 위치가 그를 외로움으로 내몰았다. 정권의 탄압과 내부의 동요 모두에 맞서야 했다. 정부와 사측이 '복귀시한'을 발표할 때마다 동요하는 간부들이 늘어갔다. 파업중단을 요구하는 지부장과 천막 안에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측 관리자들과 공공연히 만나고 오는 지부장도 있었다. 가끔은 "내 인생에 다시는 서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었고, "후회할 때도 많았다"고 이 위원장은 털어놨다.

하지만 그가 결국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전화로 들려오던 조합원들의 함성소리, 2월25일 서울대 노천극장을 가득 메운 5천여 조합원들의 외침이 그를 오늘까지 버티게 했다. "56년 어용노조를 거부하고 민주노조를 건설한 발전노조원들이 투쟁의 주인공입니다. 파업참가율 98%는 이들이 받아온 온갖 상처와 분노의 다른 이름입니다."

노동운동사에 '산개투쟁'이라는 말을 보태며 벌어진 38일의 파업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 위원장은 당선 직후 파업경험이 있는 공기업 노조들을 순회하며 자료를 모으고 경험을 들었다. 사측이 단협을 인정하지 않아 전임도 못하고 노조사무실 하나 없었지만 그는 발로 뛰며 파업을 준비했다.

"'4.2사태' 철저히 평가·조사해야"

하지만 싸움은 쉽지 않았다. 공기업 특성상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기기란 만만치 않았다. 금속산업연맹의 2.26 연대파업이 뒤따르고, 사회보험노조의 연대파업이 호위했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보여준 연대와 단결의 정신, 그리고 실천 앞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2월26일 연대파업 소식이 전해지던 그 순간, 이 위원장은 '발전노조원들이 이를 갚아 투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4월2일, 민주노총 지도부의 어이없는 합의로 투쟁은 찬물을 뒤집어썼고, 조합원들은 명동성당으로 집결했다. 파업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조합원들을 만난 이날, 이호동 위원장은 감격이 아닌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노조는 현장복귀, '조직적 퇴각'을 결정했다.

"4월2일 합의 이후 민주노총이 위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조합원들의 안정적인 현장복귀도 관건이었지요. 지도부에 섭섭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개개인의 탓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평가와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파업이 끝나고 노동자들은 기계 앞에 다시 섰지만, 현장은 아직도 아수라장이다. 사측은 노조파괴와 대의원 장악에 혈안이 돼있다. 홈페이지 접속을 차단해 노조소식은 알 길이 없으며, 유인물도 전달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래서 현장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천막을 찾을 때마다, 이 위원장은 위로를 받기보다 더 활발한 투쟁을 주문했다.

녹음기에 담긴 '마지막' 목소리

이 위원장의 아내도 천막의 단골손님이다. 아내는 천막을 찾을 때마다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울산화력 조합원인 아내와 결혼한 것은 지난 96년. 아직 아이도 갖지 못했다. 올 겨울 부인의 몸이 회복되면 아이를 갖기로 했지만, 구속을 앞둔 그로서는 이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요구가 당당하고 정당했기 때문에 가족들도 두려움 없이 싸움에 나섰습니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이 위원장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현장탄압 분쇄와 민주노조 사수를 힘주어 얘기했다.

인터뷰 다음날인 25일 새벽, 이호동 위원장은 성당에 난입한 사복경찰 10여명에게 연행됐다. 그가 강조했던 투쟁과제는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녹음기에 담긴 그의 목소리는 1백21일 농성의 마지막 흔적이 되고 말았다.

이승철 keeprun@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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