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계간 진보평론 편집위원)
2002년 6월22일. 영등포구청 방향에 있는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한 사나이가 나왔다. 지하철역까지 평소처럼 걸어간다. 오후 4시경의 거리. 마치 정물화 한 폭을 감상하는 듯 하다. 정겨운 친구 같은 바람과 악수하는 나무들 그리고 뛰는 듯 걷는 듯 들뜬 아이들처럼 노니는 참새들이 거의 유일하게 그 사나이가 지금 정물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저녁 8시50분 경 광화문에서 종로방면으로 걸어간다. 그 사나이는 '붉은 무리', '적색 환희' 속에서 이방인이다. 그 사나이의 뒤통수 아래 자리 한 '전용극장'인 후두엽(시각중추)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장면들이 오버랩(겹침)된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는 '붉은 물결'과, 자본 사이의 경쟁에서 패배해서 문을 닫게 된 종로서적 일대의 폭죽소리. 또 하나는, 1968년 5월 파리에서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적기를 휘두르는 형형색색의 대중과 화염병을 던지는 '붉은 여성', 그리고 1987년 6월 최루탄과 전경의 곤봉에 쫓겨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까지 올라간 김에 남산타워에서 '의연한 야경'을 바라보는 사나이의 장면이다.
6월22일 오후 4시경부터 10시경까지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공간에서 이 '붉은 악마'들과 그 사나이의 역사적 '체험'은 이질적인 것이다. 이 사나이의 뇌를 양전자방출단층촬영술(PET)로 찍어보면 뇌의 해마(hippocampus) 부위에 피의 흐름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의 흐름이 증가한다는 것은 에너지의 증가를 뜻한다. 그 이유는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눈앞의 사건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아울러 1987년 6월 서울시청 일대와 1968년 5월 파리 라틴구역에서 진행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할 때 그와 관련된 '주체적 체험'이 두뇌작용에 있어서 전기-화학적이고 생리적인 과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의 어떤 장면이 오버랩될 지는 기억행위 당시의 '목적'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고 이 목적은 체험 '주체'의 '정체성', '적색환희'에 접근하는 '계급의식적 소속'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적색환희'는 기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사나이는 노동자계급이 선도하는 해방투쟁이라는 목표, 꿈이라는 틀에서 기억을 '구성'한다.
사나이는 명동 맞은편에서 댄스곡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순간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12일간의 단식투쟁을 접었다는 소식을 후두엽 전용극장에 영사한다.
1987년 6월 투쟁의 기억이 블랙아웃(Blackout. 정전, 기억상실)된 젊은이들. 이 젊은이들 그리고 '붉은 무리'는 모두 카드 빚이나 실업의 공포와는 무관한 것일까? 나아가 자신과 무관하면 괜찮은 것일까? 또한 인간세상에서 글자 그대로 나와 무관한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런 무관심, 냉담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더불어 노동자계급의 삶에 대한 '감정이입과 동조'의 결여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자 삶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과 동조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아교육' 문제는 유아교육 노동자의 생존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장래 변혁운동의 주동력이 되어야할 젊은이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감정이입과 동조는 유아기에 '자애심'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뿌리깊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히딩크의 조국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에 가면 자유주의 부르좌의 투쟁에 관한 장대한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투쟁에 관한 자랑스런 기억을 지니고 렌즈연마 기술자이자 혁명적 사상가인 스피노자를 탄압하고 추방했다. 사춘기라는 '꽃샘추위' 속에서 사나이가 벼락처럼 들은 스피노자의 금언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였다. 지구의 종말로 따지자면 그의 시대보다는 오늘날 더 그 현실성이 있다. 네덜란드 자유주의 부르좌가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에 그의 깊고 깊은 삶에의 용기가 오늘날 남한 노동자계급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 용어해설
인지과학: '앎'이라는 행위를 신경과학, 인공지능, 심리학, 철학, 언어학적 접근으로 연구하는 학문의 새로운 경향, '통학과적' 학문의 전형이다. 이성적 추론, 기억, 감정, 창조성 등등이 연구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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