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사]6.25전쟁기의 노동운동(2)

김상복(노동자의 힘 노동위원장)

30년 만에 부활된 조선방직 파업투쟁

1951년 6.25 전쟁 중 부산에서 전개되었던 '조선방직파업투쟁'이 30년 만에 부활되었다. 79년 10.26 정변 이후 노동자 파업투쟁과 학생들의 집중적 가두시위를 뒤로하고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 1년 후. 1981년 11월 영등포 당산동 소재 산업선교회 3층 강당에서였다. 70년대 후반 이후 몇 안 되는 어용 한국노총에 독립하여 활동하던 민주노조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마당극을 창작하여 11월 노동제를 통해 선언하는 자리였다. 광주 민중항쟁 패배를 기회로 많은 활동가들이 운동전선을 떠나가고, 남은 자들은 70년대 계급투쟁의 발전과 한계를 처절히 부정하며 벌써부터 지하로 스며들고 있던 그때였다.
숨겨져 있던 원전들과 사상서들이 넓게 보급되고, 학생운동 일부에서는 정치투쟁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시 역사를 처음 시작하듯 공장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던 그 당시. 공장 소조, 야학노동자, 몇 안되던 민주노조의 조합원들 그리고 아름아름 연락 받고 모여든 선진학생운동가들 700여명은 70년대 노동문화운동을 작품으로 총괄하고 80년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노동창작극을 통해 '30년 만에 부활하는 조선방직 파업투쟁'을 목격했던 것이다.

파업투쟁선언문

"금번 우리의 쟁의는 임금인상 후생문제 해고자 복직 등 노동조건 투쟁이 아니요, 노동자도 인간대접을 받자는 인권확보투쟁이요 노동자가 단결에 의하여 자기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민주노동조합운동 확보 투쟁이다! 만일 강일매의 행동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인된 행동이라 하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시금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최후의 투쟁을 각오하는 것이다.… 이 전쟁 역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전쟁이니 만큼 눈물을 먹으면서 조방에서 파업을 단행할 것을 백만 맹원 및 삼천리 동포와 민주주의 국가 전 자유 노동자에게 엄숙하게 선언한다. 백만 맹원 동지는 결사의 각오로서 중앙의 명령이 있을 때 언제든지 최후 수단에 돌입자세를 정비대기 할 것을 엄숙히 명령한다."(52.2.27. '파업선언문'을 공연 시 축약)

실제처럼 극중에서 재현된 '파업투쟁선언' 그 순간, 모든 청중은 숨막혔고 연기하는 노동자도 청중도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전쟁 중 파업'이라는 소재는 '광주항쟁 내에서의 노동자 파업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처절한 한계를 떠올리며 모두들 통탄했다. 극중 전투경찰에 의한 파업노동자 구타와 탄압 장면에서는 연기하는 경찰 노동자도, 매맞는 극중 투쟁하는 노동자도 모두 울면서 연기했다. 이 모든 것이 즉각 80년 5월 '서울의 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탄압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하 30년대 조선방직에서 있었던 몇 차례의 파업투쟁(30년, 33년, 37년)은 춤으로 표현되었으며, 작업장 방직기계소리는 꽹쇠에 동전을 넣어 흔들었는데 제법 그럴 듯 했다. '작업장에서의 노동 동작'에 근거한 춤사위는 모든 노동자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어 동감을 표했다.
해방 직후부터 전개된 여성노동자와 한국인경영진에 의한 '공장관리위원회' 활동은 당시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해 불하받기 3일 전 육군 특무대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좌절되었다. 즉각 이승만의 지원을 받은 강일매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들은 즉각 자기 사람들 사원급 67명을 비롯한 123명을 채용하고 일제하부터 일해온 장기근속 노동자 20명을 무단해고 한다. 또 '대한노총 조방분회' 포섭 및 파괴작업에 착수한다. 이에 맞선 조방 노동자들은 '투쟁선언'을 발표하고 1월14일 1300명 공장내 시위를 출발로 하여 1월21일 여공을 주력으로 1000여명 국회 앞 대중시위를 전개한다. 그러나 대한노총 중앙은 서로 분열해 싸우고… 1달여 동안 국회와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개입했으나 2월5일 보궐선거 시 당시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 만이 조방 조합원의 강력한 지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강일매 사장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한다. 이에 조방노동자들은 2월27일 '파업투쟁 선언문' 발표와 함께 파업투쟁에 돌입한다. 허나 끝내는 대한노총에 의해 3월1일 파업이 중단된다. 즉각 공장 안엔 800명의 군복 입은 경찰들이 상주하고….
이 모든 것이 81년 당시의 정세조건과 유사했으며 운동 현실과 차이가 없었다. 아니 이 노동자 창작 사례 마당극은 당시 우리 운동이 어디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가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일차 지점이 어디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파업투쟁'조직화였다. 공연이 끝나자 강당을 꽉 채운 700여명의 관람자들은 모두 농악 장단에 대동놀이를 하며 춤을 추었다. 눈엔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주치는 눈빛에 서로들 웃으며 돌고 돌았다. 춤과 노래와 어깨동무를 하며…, 마지막으로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또 부르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계획이 없어선지 아니면 '현장선동'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두는 포위된 경찰들을 지나 술집과 집으로 향했다. 술집에선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고 일부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 공연관람하며 받은 느낌과 문제제기를 깊게 음미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70년대 노동문화운동의 총괄이자 80년대 노동문화운동의 출발

"세미나에서만 들었던 '노동자 문화생산력'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 대본과 극 구성을 조합원들 스스로 학습하고 토론하며 만들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당시 공연을 관람했던 o 씨 회고)
"무슨 운명 같아요, 그 공연하고 꼭 일년 만인가 원풍모방이 조선방직처럼 깨졌잖아요. 비록 지금은 노동운동을 그만두었지만 아직도 그 활동은 내 생활의 기준이에요"(2002.7.1. 20년 만에 다시 모인 모임에서, 당시 원풍모방 탈춤반 ㄱ 조합원)
"그때 여러 야학 노동자들과 함께 봤었어요, 당시엔 서로 통성명 안하고 눈으로만 인사하던 시절인데 나중에 몇 년 후 그 동지들을 인천 5.3 시위 현장에서 다시 봤지요. 그 공연은 당시 많은 학생들이 왜 현장에 들어가야 하는가를 감격스럽게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나에게도."(당시 야학 교사였던 ㅊ 노동운동가의 회고)

80년대 노동운동이 대중적으로 발전하는데 큰 몫을 했던 노동문화운동의 원형과 동력을 찾아 올라가 보자. 그러면 70년대 중 후반기부터 '민중문화운동 복원과 창작 및 되돌려 주기 운동'과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시에는 박정희 군부독재의 산업화 추진을 위한 효율화와 획일화에 의한 문화적 억압이 사상통제와 함께 진행되었던 시절이다. 노동문화운동은 '민속문화 속에서 민중문화의 근거'를 찾고 피억압자의 삶 속에 관통하는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문화전선을 구축했다. 이는 양차 대전 후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60년대 후반이후 전세계 지식인, 청년운동의 대항 패턴으로 보면 세계적 공통점이기도 하다.(에릭 홉스봄) 이러한 70년대 문화운동은 광주 항쟁을 겪으며 변화를 강요받는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삶이나 경찰이나 한국노총, 자본가에게 탄압 받는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눈물로 호소하는 운동으로서의 노동문화운동을 떨쳐 버린 것이다. 작품으로 방향을 제시한 그 출발점이다.
공연이 곧 투쟁이었던 시기, 이는 투쟁사례를 분석하는 사례극이자 공연당시의 운동현실에 직접 발언하는 선언극, 형식에 있어 우리나라 민중문화(탈춤과 마당극)의 형식과 방식을 계승한 창작 마당극, 노동자들이 파업 공부와 토론을 통해 공동으로 대본과 안무를 만들어내는 집단창작극이자 이 공연을 준비하고 만들고 서로보고 서로 토론하는 학습극이었다. 80년대 노동문화운동의 방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1년 후 전개된 조선방직 파업투쟁이 30년 지나 광주민중항쟁 1년 후 재현된 원풍모방 노동조합 탈춤반의 조선방직 공연으로 부활한 것이다.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파업' 투쟁을 전개하는 사실을 통해, 사상통제아래 전개되고 있는 당시 운동의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노동자들이 뛰어넘자고 말하고 있다. 또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이 공장사수와 공장점거 파업을 중시하지 않고 일부 종교적 지식인 활동가들의 안내대로 주요 전술형태가 가두와 교회, 야당당사로 나와 투쟁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그대로 80년 5월 '서울의 봄' 투쟁에서도 반복된다. 당시 주요 투쟁 집중점이 '연대 동맹파업 조직화'가 아니라 어용 한국노총 분쇄투쟁(항의 농성투쟁, 가두투쟁)에 머물렀다.- 이제 70년대 노동운동은 과거 자신의 투쟁에 대한 반성으로 '조방쟁의가 실패한 원인'이 (어용)대한노총에 이끌려 국회 항의투쟁에 집중하고 공장파업을 실패했기 때문이다는 사실을 공연에 빗대어 고백하고 있었다. 또 이를 보는 학생운동은 노동자 대중파업투쟁과 결합되지 않는 학생과 시민의 정치투쟁의 한계를 둘러싼 여러 논쟁의 종식을 촉구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9개월만에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조방쟁의와 같은 모습으로 파괴되었다. 종교단체와 양심적인 지식인 활동가의 영향아래 있던 70년대 민주노조의 사업장이 대부분 깨진 것이다. 그 후 머지 않아 원풍모방과 밀접했던 영등포 산업선교회(대표적인 노동운동 참여 종교단체)와 조직적, 활동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이제 스스로 자기조직을 만들어 간다. 조선방직 쟁의의 교훈처럼.

조선방직 파업투쟁 역시 해방이후 노동운동의 총괄이며 전후 노동운동의 출발점이다

6.25 한국전쟁 성격 중에 하나가 '농지개혁의 내용과 방식 및 그 주체를 둘러싼 대립과 투쟁'이라 할 수 있다면, 조선방직 쟁의는 노동자 스스로 전개한 '공장관리위원회'에 의한 접수운동의 최후적 실패사례라 볼 수 있다. 노동자와 내부 경영진에 의한 '공동인수(공동소유)'를 위한 노력은 파업실패 이후 이승만 정권의 지휘아래 '사적소유'로 귀착된다. 대한노총 전진한계와 국회를 한편으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귀속재산 처리 방법'을 둘러싼 대립(한국사회체제 미래 전망을 둘러싼 대립)이 배후에 작동된 투쟁이다.
우리 자본주의가 '매판적 관료독점자본주의'로 출발했다면 그 구체적 근거가 조방쟁의 파업과 그 처리과정에서 드러난다. 또 6.25 한국전쟁중 노동관계 4대법이 제정되었다. 조방쟁의는 이 노동관계법 제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왜 하필이면 전쟁 중에 노동관계법이 제정되었는가. 더 세밀하게는 왜 집단적 노사관계법(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이 근로기준법 보다 먼저 제정·공포 되었을까에 대한 답변 중 하나에 조방쟁의가 있다.
조선방직 쟁의를 기점으로 대한노총은 반공노동자동원조직에서 탈피하여 (우익)노동조합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이승만 자유당의 원외동원조직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몇 가지 점을 들어 한 일본연구자는 조선방직쟁의를 한국 현대 노사관계의 출발선이라고 까지 지적한다.(나까오 미찌꼬)

조선방직 파업투쟁 연구의 한계와 과제

그러나 조선방직 쟁의에 관한 연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애초 조선방직은 전평 산하노조 였다.(우익 대한노총계열의 활동가들은 전평 산하라기 보다는 독립노조에 가까운 '조방자유노조'라고 지적한다.) 그 조직 역량은 어떻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30년대 쟁의에서 해방 후 전평에 의해 주도되었던 총파업투쟁에 참여(가령 48년 2.7 총파업에 조방 노동자 3000명 참가-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 신문) 51년 파업투쟁에 이르기까지 투쟁의 역사가 현장노동자, 여성노동자의 시각에서 노동조건과 움직임을 중심으로 연구 된 것이 전무하다.
장기 근속자를 중심으로 전평 조합원은 물론 사업장에 들어갔던 우익청년조직 중 민족청년단 계열과 대한노총의 활동을 뒤받침 했던 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의 활동이 -이 두 우익 청년조직은 서로 대립과 충돌하고 있었다- 조방 사업장에는 모두 있었다. 또 600여 명의 해고 여성 노동자들의 이후는 또 어찌 되었는가. 남겨진 연구과제는 끝이 없다.
이들의 투쟁과 삶을 추적하고 관계자들의 구술을 남겨두도록 하는 것이 어찌 뒤따르는 자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감히 '현장 여성노동자의 투쟁기록'이라도 복원해야 한다. 그 최선의 노력을 다음 호에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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