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모두의 축제가 되지 못한 월드컵 - 원(하자 작업장 학교 소속)


월드컵 기간 중, 공교롭게도 한국 축구팀의 경기가 있던 날마다 나에게도 매번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때문에 터져 나오는 함성의 정도에 따라 골이 들어갔다, 아니다를 점치고, 간간이 현재 스코어 몇 대 몇인지를 확인하며 힘든 회의와 수업을 이어갔었다. 축구 경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이런 상황도 힘들었지만,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을 뒤덮은 야릇한 흥분의 열기와 붉은 티셔츠들의 거친 움직임을 헤치며, 붉은 악마가 되고 싶지 않지만 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괴로웠다. 실제로 나는 붉은 옷을 입지 않았고 게다가 통화 중이었음에도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넓적한 손바닥(아마 하이파이브를 하려고)을 순간 공격의 뜻으로 판단, 날렵하게 허리를 숙여 피한 적이 있는가하면 같은 방향이면 태워주겠다는 차들을 수없이 물리친 후 꾸물대는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날이 축구 전문 신문이 되어가던 우리 집 신문 구석에서 "조심! 붉은 늑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월드컵대회 길거리응원을 마치고 귀가하던 10대 여성들을 꾀어 차에 태운 뒤 성폭행"한 두 명의 남성과 "거리응원을 하던 미성년자 2명을 성추행"한 한 명의 남성이 붙잡혔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월드컵 단신 정도로 취급된 짧고 비중 없는 기사였지만 그 기사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변에서 여러 번 들어왔던, 아예 성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작정하고 거리를 나선다는 붉은 티셔츠의 남자들 이야기, '나도 붉은 악마!'했다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과 그만큼의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세탁한 붉은 티셔츠를 태연히 장롱 안에 넣어둘 수많은 범죄자들, 붉은 늑대를 "조심"하라는 내용 그대로, 기사가 나간 후 축구고 뭐고 일찍 집에 들어와 문단속 철저히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딸들, 그리고 집에 갈 때마다 느껴야 했던 강요된 흥분과 축제의 기억들이 발길에 차인 수십 개의 축구공처럼 일제히 튀어 올라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은 "나를 폭행한 그 놈은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4천만 붉은 악마의 함성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경기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덕분에 즐거운 경기를 보았다고 박수를 보내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멀쩡한(?) 신체를 무기로 한 23명의 젊은 남자들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느 팀이 더 젊고 더 강한지를 경쟁해서 세계 순위를 매기는 월드컵이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평화의 축제라는 말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이번 월드컵은 한국의 언론과 정부와 기업이 삼박자를 이루어 온 국민을 하나의 가치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정말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축제가 될 수도 있었던 가능성마저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4천만 국민 중에는 여성이 있고 장애인이 있으며 10대 이하의 사람들과 60대 이상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소수자의 인권은 국가적 행사이자 축제라는 명목 아래 잠깐 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한국의 이미지를 위해 정부가 앞장서서 스포츠'맨(man)'쉽과 정상 신체 중심주의(Able-Bodyism)를 부르짖으며 집단적 애국심을 조작하는 동안, 축구 경기에 참여할 수도 없지만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고, 붉은 악마로 하나되고도 싶지만 사실 결코 그럴 수 없는 소수자들은 또다시 소외되어 왔다. 축제의 열기를 느껴보고자 빨간 옷을 입고 밤거리를 활보한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하나되기도 전에 성폭행을 당함으로써 자신이 여자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 월드컵이 끝난 지금 세계적인 강간국인 한국의 정부는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수많은 성범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앞장 선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뒤를 따르는 붉은 옷의 멍청한 남녀 커플이 되는 것만이 여성이 월드컵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여자 기동 수사대 : 02-738-8080 장애여성 성폭력 상담소 : 02-3013-1367. www.was.or.kr 한국 성폭력 상담소 : 02-338-2890-2. www.sister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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