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기서 제일 보기 싫은 게 저거예요”
위압적인 자태를 자랑하며 우뚝 솟은 대법원 정면에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세 단어, ‘자유, 평등, 정의’.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일하는 곳, 그 건물 지하에서는 전기, 수도, 경비 등 각종 관리 업무를 대신하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이 평균 7, 8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한다. 전국 시설관리 용역업체 중에서도 가장 대우가 나쁘다고 악명 높은 ‘명호’가 바로 이들을 고용한 회사다.
지난 6월28일, 대법원 시설관리 노동조합이 ‘명호’ 측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을 때, 합법적인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곧장 “너희 사업장에 가서 파업하라”며 지부장 최대엽 씨와 집행부 2명을 연행해 불구속 처리했다. 이미 사면처리된 그의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경력을 들어 해고를 종용한 것도 대법원이다. 그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자유, 평등, 정의’라니.
“한국노동청년연대 활동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99년 사면복권됐습니다. 그 경력 때문에 작년 말에도 힘들게 들어간 회사에서 두 달만에 해고가 됐어요. 국방부 합참본부신축공사 현장에서 일했는데 국방부가 ‘신원에 이상이 있다’고 통보를 한 겁니다. 그 때는 국방부라는 특수성(?)도 있고 개인 사정도 있어서 그냥 씁쓸하게 나왔지만 이번에는 참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국가기관이, 법을 상징하는 대법원이 이렇게 법을 어기고 부당한 인권유린을 한다면, 나도 그 놈들 옷 벗게 하겠다는 각오로 덤볐습니다.”
출근투쟁 일주일만에 복직됐지만 실상 그의 신원이 문제가 된 건 4월26일 대법원 시설관리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그가 노조지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명호는 대법원과 용역 재계약을 체결할 때만 결원 인원을 100% 채우는데, 지난 3월 재계약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14명을 신규 채용했다. 그런데 기존 직원들보다 신규 직원들의 급여가 약 10만원쯤 많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기존 직원들을 중심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게 됐다. 대엽 씨 역시 이런 요구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려고 서명에 동참했다. 그런데 명호는 ‘다시는 집단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서명을 하라고 종용했고 나이 많은 직원들의 해고를 공공연한 협박 수단으로 삼았다.
“다들 대책을 논의하자고 모였는데 ‘일괄사표 내고 나가 버리자’로 의견이 모아지더군요. 그래서 노조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회사가 ‘노조 만들면 무조건 계약 해지된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더군요. 제가 동을 뜨고 4월26일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모여서 전국시설관리노조 가입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순식간에 32명이 가입원서를 제출했어요. 정원의 2/3가 넘는 직원들이 조합원이 된 겁니다. 전국시설관리노조에 가입원서를 제출하고 지부 ‘인준필증’을 받아들자니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월급도 얼마 못 받는 비정규직 직장에 목숨 걸 일 있냐고 노조 가입은커녕 파업도 방관하는 직원도 있다. 그도 이해한다. 구속경력까지 있는 운동권인 그도 애초부터 노조를 만들겠다, 비정규직 운동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제 나이가 서른 다섯입니다. 운동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지요. 돈도 못 벌고 결혼도 못 하고. 잠시 활동을 접고 의기소침해 있다가 돈만 벌겠다는 마음으로 여기 온 겁니다. 다들 이런 직장은 거쳐가는 곳, 일할 곳 없는 나이 든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여기에서 이렇게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죠.”
사회당 정치연수원 사무국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해부터 잠시 쉬고 있는 그다. ‘운동’만 하면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문득 허탈하고 자신 없어져 마라톤 완주도 하고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혼자 국토 도보 순례를 해도 마음은 답답했다. 힘들게 취직한 직장에서는 국보법 위반 경력으로 해고됐다. 춥고 외로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취직한 직장에서도 여전히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이력. 정면으로 맞서고 나니 비로소 그 이력은 그에게 세상 없는 ‘무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힘이 됐다. 전경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연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권력이나 기업주의 협박에 무덤덤한 그는 무엇보다 주변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더 좋은 직장에 가려고 저 역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그런 개별적인 노력에 몰두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사이에 비정규직 노동자는 7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비정규직 철폐야말로 노동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힘을 모아야겠죠.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폭포가 되는 거 아닙니까?”
장성희 / jsh@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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