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와 남은 자들⑪]12년 세월이 씻지못한 아픔

최응현 열사 어머니 서화자

윤재설 dllp21@kdlpnews.org
1990년 한가위날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다섯 식구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중계동 아파트공사장에서 함바(공사현장의 간이식당)일을 하던 어머니는 이것이 다섯 식구가 마지막으로 모인 자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젠가 식구들이 한데 모여 오손도손 살 수 있는 날을 꿈꾸던 어머니의 희망은 둘째아들 최응현(당시 21세)이 그해 가을 먼길을 떠나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큰애는 공주교도소 출감해서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있었고 응현이는 막내랑은 창동에서 건설현장일을 했어요. 저랑 딸애랑 중계동에서 살고 있었죠.”

남편과 헤어진 이후 3남1녀를 맡아서 키우게 된 서화자(60·서울 장안4동·사진)씨는 함바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1987년 한양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한 최응현은 강원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큰형 최응석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대학에 교련이 남아있던 1988년 당시 대학가에서는 전방입소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최응현은 전방입소 반대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88년 6월 대검찰청 점거농성으로 구속됐다. 당시 맏아들 응석은 강제징집을 당했다가 군 형무소로 끌려가 공주교도소에 이감된 상태였다. 서씨는 둘째가 있는 서울구치소로, 첫째가 있는 공주교도소로 면회를 다니며 두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그해 11월 집행유예로 출소한 이후 이듬해 최응현은 1989년 공대 학생회 홍보부장, 1990년 반미소위원회 활동 등을 했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게 된다.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서씨도 둘째아들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다들 흩어져 살다가 명절때 모였어요. 그리고는 응현이를 몇번 보기도 했는데 그해 11월 6일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현장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려니’ 생각하고 한양대의료원을 찾아갔는데 아들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칼로 손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의사는 서씨에게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권유했었다.

“그때 입원을 시켰으면 죽지 않았겠죠. 지금도 그게 후회가 되요.”
치료를 받은 후 아들과 함께 한양대의료원을 나선 서씨는 이틀 뒤인 11월 8일 다시 이 병원을 찾게됐다. 응급실에서 아들을 찾았지만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최응현은 이날 낮 유서를 남기고 한양대 공대 제3교육관 옥상에서 투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동지들에게 후배들에게 자랑스럽지는 못할지라도 떳떳하게 남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은 해봤지만 주위조건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폐인이 되어진다…끝끝내 동지들에게 힘을 줄 수 없는 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그 애가 사면초가였을 거예요. 가정에 의지할 수 있고 위안 받을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둘째 아들만 빼고 서울 장안동 집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유가협의 여의도 천막농성에 참여했던 서씨는 지난해 결국 아들이 민주화운동희생자로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 시절 죽어간 아이들은 제외되고 있는 게 맘에 걸린다”고 말한다. 강제징집 당시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큰아들 응석씨가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제외된 것 갖고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이다.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식당일을 하다 잠시 쉬고 있는 서씨는 요즘 다시 가게를 알아보고 다닌다며 “언제 가게문 열면 연락할께 오세요. 맛있는 것 해줄테니까”라고 미소띤 얼굴로 기자를 초대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차분히 얘기를 털어놓던 서씨의 눈가는 어느새 젖어있었다. 12년 세월로도 어쩔 수 없는 슬픔은 그렇게 남아있었다.
[ 94호] 7.1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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