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애니메이터의 '굶어죽을 자유'에 대해 아는가

포럼-'애니메이션산업 기층인력의 근로환경과 복지정책'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우리 애니메이션 영화 '마리 이야기'가 '2002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국내시장의 흥행은 차치하고라도 국산애니메이션의 기초체력이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기초체력만으로 시장을 설득할 수 있던가? 수상의 기쁨은 만끽하자. 하지만 이제는 그 기쁨 뒤에 가려진 우리 애니메이터의 고통스런 현실을 볼 때다.

지난 7월 3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가 '대중문화예술산업 종사자의 생활권 확보'를 위한 2차 정기포럼-'애니메이션산업 기층인력의 근로환경과 복지정책'을 열었다.

이날 전국애니메이션노조 류재운 위원장은 발제를 통해 "근로자로서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애니메이션노동자들은 15년 전부터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애니메이터들이 '프리랜서'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분열될 수밖에 없고 개인화 되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제작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는 바로 '현장'에 포진해 있다. 말하자면 "애니메이터는 준비되어" 있는데 사주는 "관행"을 내세우며 고급인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류 위원장에 앞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황과 노동시장 문제에 대해 발제를 한 세종대 한창완 교수(만화애니메이션학과)는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성공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결과도 전무한 상태"라고 지적하면서 그로 인한 "지속적인 자금투자와 외부양성자본의 적극적인 참여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제작비 조달이 어려우면 관련업계에서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것은 애니메이터들이라는 것. 한 교수는 더불어 "전체적인 애니메이션시장의 파이가 극대화되어야만 국내시장의 제작물량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 되고 그 수준유지상태를 전제로 애니메이터의 인건비 수준과 복지 수준에 대한 대안 모색은 적극성을 띌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 교수는 제작인력의 경력 검증과 포트폴리오 데이터 베이스(DB) 구축, 애니메이션 관련 협회 및 단체 상호간의 위상확립 및 역할 분담을 선결 조건으로 제시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계약서를 달라는 게 잘못이냐?

한국 경제가 WTO에 가입하고 IMF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2배까지 오른 환율로 인해 평년의 세 배에 가까운 수익을 창출했다. 달러로 받은 수주금액을 원화로 환원하면서 큰 차익을 얻은 것. 그러나 애니메이터들의 임금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가를 계산하면 오히려 임금은 깎였다. 사주는 현장 애니메이터에게 국가부도사태 운운하며 단가를 낮추면서 강남 일대의 비싼 땅을 사들이는 기이한 행각을 보였다. 류 위원장은 "이 시기에 엉터리근로계약서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사주는 자신들의 논리에 맞춰 애니메이터들을 정규직에서 개인사업자로 둔갑시켰지만 애니메이터들은 '본인이 신고하지 않은' 개인사업자 등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인건비 따먹기'라는 게 류 위원장의 주장이다.

애니메이터들은 개인사업자 등록이라는 업계의 관행을 거부하겠다는 것. 업계는 애니메이터들이 근로자인정투쟁의 일환으로 퇴직금 지급 진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모든 팀장을 소사장으로 등록시키는 편법을 쓰고 있다. 이는 팀원이 사측의 근로자가 아닌 팀장 소속 근로자라고 주장하기 위한 편법일 뿐이라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애니메이터들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계약서를 원한다. 4대 보험과 퇴직금, 휴가, 상여금, 기타 수당이 명시된 정규 고용계약서와 관행을 따른 프리랜서 계약서, 이 둘을 놓고 애니메이터가 직접 선택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센티브제도를 통한 근로의욕 고취와 질 높은 작품 생산을 유도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류 위원장은 애니메이션업자들이 국내 고급 애니메이터 인프라에 의한 "생산적인 재투자를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애니메이터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주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 2000년 7월24일 노동부는 애니메이터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했고, 이듬해인 2001년 7월24일 대법원 역시 노동자성을 인정했지만, 사측은 여전히 노동자가 아니라며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재미있는 국산 애니메이션?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류 위원장은 "현장엔 일자리와 일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애니메이션 원청국은 자본의 논리대로 싼 인건비를 찾아 애니메이션개발도상국(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으로 일거리를 돌리고 있다"며 한국이 애니메이션 세계 최대 제작국이라는 치부는 '과거지사'라고 단언한다.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잔업과 철야·산재 등의 고통을 감수해 닦아놓은 애니메이션 시장을 무용지물로 만든 애니메이션업자들은 거액의 공적자금 투입의 책임추궁 또한 비껴갈 수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 류 위원장은 '애니메이션노동자 무료취업 알선센터'의 설립을 제안했다. 2002년 5월 노사정위원회의 발표에 근거해 노조의 숙련된 애니메이터의 기술을 대학에서 배출한 초급자와 연계한 지속 가능한 인프라 확립을 꾀하자는 것. 하청작업(OEM)시장으로 과거의 명성을 쌓았다면 이제는 애니메이터의 지속적인 재교육을 통한 기획과 창작시장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선 문화관광부·노동부·교육인적자원부·노조가 함께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방송용 애니메이션 쿼터제를 도입해 시청자(관객)가 재탕, 삼탕의 애니메이션을 봐야 하는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무방영비율이 아닌 '의무제작비율' 명시를 주장한다. 방송진흥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개념 정립이 미흡해 벌어지고 있는 제작비 오용 문제도 전면 수정할 사안. 이에 더 나아가 류 위원장은 "국고지원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 심사 때 노조도 참여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업체로의 독식을 막고 덤핑 관행으로 얼룩진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정부 단위의 정책도 이날 포럼에서 제시됐다. 또한 성장일변도의 시장에서 애니메이션노동자의 복지와 권리문제를 꼼꼼히 따져봐야 하며 고급인력이 비수기의 생존을 위해 택시운전, 막노동, 이삿짐센터 등으로 낭비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를 위해선 국민기초생활보호법에 의한 최저생계비 수급권자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저임금과 열악한 제작환경에 의한 숙련노동자의 현장이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사주, 그리고 애니메이터들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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