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 실상 드러낸 미국 기업 회계 조작

뻔뻔스러운 너무나 뻔뻔스러운

▲ 엔론, 제록스, 월드컴, GE 그 다음은?
사진은 미국 미시시피주 월드컴 본사 건물

조준상/편집위원 sang21@hani.co.kr
지난해 12월 미국 제7위 기업인 엔론의 회계 부정 및 파산, 올 1월 거대 통신업체인 글로벌 크로싱의 회계 부정 및 파산, 올 4월 세계 최대 복사기 제조업체인 제록스에 대한 회계 부정 조사, 올 5월 세계 최대 기업집단의 하나인 타이코의 회계 부정 사건, 올 6월 거대 통신업체인 월드컴의 회계 부정과 파산 위기, 그리고 세계 최대의 전기·전자업체인 제너럴일렉트릭의 회계장부 조작 등.

이윤을 부풀려 주가를 띄우고 탈세를 위해 회계를 사기치는 금융 추문이 또 다시 미국 자본주의를 강타하고 있다.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이후 앞으로 몇 개의 ‘엔론’ 사태가 더 터질 것이냐는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신경제’의 황금기이던 2000년까지 6년 동안 이윤을 부풀린 미국 기업들에 대해 7백83건의 부실한 회계감사가 이뤄졌다고 하고, 감독당국의 회계 부정 의혹을 사고 있는 기업만도 1천여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기업들의 금융 추문에 미국의 유수한 회계감사기관, 투자은행, 은행 등이 모조리 연루돼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막말로 미국 자본주의에서 ‘깨끗한 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하던 미국의 기업 경영은 가장 불투명한 것으로 전락했다.

이를테면 64억달러에 이르는 수입을 분식한 제록스의 회계감사는 미국 4대 회계기관의 하나인 KPMG였다. 미국 4대 회계기관의 하나로 엔론의 회계를 맡았던 아서앤더슨은 이미 파산한 상태다.

엔론 사태에 깊숙히 연루된 이른바 ‘엔론 9적’은 제이피모건 체이스, 시티그룹, 크레디스위스퍼스트보스톤, 캐나다상업제국은행, 뱅크오브어메리카, 메릴린치, 바클레이, 도이체방크, 리먼브러더스 등이다.

게다가 메릴린치는 최근 자사의 증권 애널리스트가 가치가 없다고 평가한 주식을 고객에게 사라고 권유해 차익을 챙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사업영역을 축소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엄청난 회계 부정과 금융 추문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개인적 일탈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고,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건강하다고 내세운다. 하지만 무더기로 쏟아지는 금융 추문은 미국 경제의 시스템 자체와 관련이 있다.

금융시장에 대한 탈규제, 주식시장과 긴밀히 연동되는 기업 실적, 회계기관들과 기업의 밀착,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통한 경영진 보상 등이 그것이다. 주식시장을 매개로 이어진 이 시스템에서는 기업 경영진을 감시·감독할 어떤 장치도 작동되지 않았다.

주가가 뜰 때는 이런 치부가 드러나지 않다가, 과잉투자에 따른 불황, 이윤 하락 등에 직면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미국의 전방위적인 회계부정 사건은 90년대 이른바 ‘신경제’의 실상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이미 회계감독위원회 창설 등 감독 기능을 강화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부분적 개선만으로 금융 추문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는 시장 근본주의를 버리고 금융시장에 대한 전면적인 재규제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회계 감독만이 아니라 기관투자의 감시감독 강화, 주주소송 확대, 주식투자 중심인 기업연금의 전면 개편 등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주류 정치권과 업계에서 “기업 회계조작의 발각은 시장이 작동하는 증거”라는 식의 궤변이 판을 치고 있는 한 이런 개혁은 불가능에 가까운 하다.

이런 수사가 통하지 않으려면, 미국 자본주의, 나아가 세계경제는 철저한 위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최악의 시나리오는 투자자들이 미국을 떠나고, 달러가 폭락하며, 수입물가가 높아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먼저 잇따른 회계부정 사건으로 투자자들은 이미 미국을 떠나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연간 4천억달러에 이르는 경상수지 적자와 함께 회계부정 사건들은 달러 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준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급격한 달러 가치 하락을 막고 이탈하는 외국자본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현재 1.75%에 불과한 단기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금리 인상은 미국 경제의 불황을 깊게 할 수 있고, 주식시장의 추가 폭락을 낳을 수 있다. 금리가 높아지면 투자자들이 주식보다 채권을 사려고 할 것이고, 돈이 채권시장으로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미국 경제가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부시 행정부의 ‘전쟁놀음’는 더욱 광기를 띠어갈지도 모른다.

부시 대통령은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중동사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지도자로 있는 한, 그리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장경제’를 보유할 때까지 평화 과정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부시가 말하는 이 시장경제가 대형 회계부정 사건이 잇따라 터지고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일 모레 새빨간 거짓말임이 들통날지라도 당장은 혐의 사실을 부인하는 국내 대다수 정치인들의 뻔뻔스러운 모습, 부시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 95호] 7.8 ~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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