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와 남은 자들⑫]"세진이는 내 선배이자 선생님이었어"

김세진 열사 부모 김재훈 김순정

윤재설 dllp21@kdlpnews.org
신입생 중에서는 유일했다. 1983년 3월 서울대를 담당하는 관악경찰서의 요시찰 대상에 1학년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된 서울대 자연대 1학년 김세진.

교련교육이 필수였던 당시 남자 신입생들은 입학하자마자 문무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는데 김세진은 훈련기간에 ‘찍혀서’ 특별훈련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부모에게 전화를 해 자기 연구실에 붙잡아두고 공부를 시키겠다고 했고 담당형사는 아예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음악에 소질이 있어 경복고 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서도 전교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막내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형사의 감시를 받는 ‘운동권 학생’이 된 것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큰아들(김갑진)이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작은아들마저 이러니 부모는 애간장이 탔다.

1986년 4월 자연대 학생회장이 된 아들은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다. 자연대 학장이 “세진이가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려달라”고 집에 전화를 했다. 걱정스런 마음에 세진을 찾으러 학교를 3일째 돌아다니던 4월 28일 아버지는 학과 사무실에서 “세진이가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한강성심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날 아침부터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의 가두집회가 있었다.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당시 21세)과 반전반핵투쟁위원장 이재호(당시 21세)는 집회를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맞섰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청년의 몸에 불이 붙었고 “전방입소 결사반대”, “반전반핵 양키고홈” 소리가 들렸다.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아버지의 눈앞에 상체가 시꺼멓게 탄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는…친구는…”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른 아들은 아버지에게 먼저 이재호의 소식을 물었다. 분신과 함께 옥상에서 추락한 이재호 역시 전신 80% 이상의 3도화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벼운 상처라 금방 퇴원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제서야 세진은 “아버지,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몸에 불이 붙은 후 구호를 외치는 바람에 불기운이 기도를 타고들어가 폐에 수포가 생겼고 전신 60%의 3도화상 부위에 세균이 감염되면서 김세진은 5일만인 5월 3일 숨을 거뒀다.

“저의 행위는 한 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읽은 수백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믿어 주십시오.…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가슴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 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21살 짧은 생을 마친 김세진이 남긴 마지막 편지에 쓰인 대로 그의 투쟁은 반미투쟁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게된 부모는 아들의 뒤를 따랐다.

“죽고 나니까 온 사회가 세진이를 욕하는 거야. 불효자로 매도하고. 김대중이도 ‘과격하다’고 몰아붙였지. ‘내 자식이 목숨까지 바쳤는데 어떻게 매도할 수 있는가’하고 반감이 들었어. 내 자식을 내가 이해 못하면 어느 누가 하겠어. 그래 생각해보니 세진이가 주장했던 게 옳았던 거야. 세진이가 내 선배이고 선생님이었던 것 같아.”

김재훈(67·사진 오른쪽), 김순정 부부는 둘째아들 세진의 죽음 이후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각종 집회와 강연에 참석하면서 아들이 못 다한 투쟁을 이어갔다.

“쟤들이 탄압하지 않았으면 우린 죽었을 거야. (경찰이)아침저녁으로 따라다니고 문앞에 지키고 서있는 거야.”
‘투사’가 되어버린 부모는 철통같은 감시를 뚫고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집회에 참석했다. “양키의 용병교육”을 반대했던 아들의 뜻을 후배들에게 알리기 위해 1989년까지 전국의 대학이라는 대학은 다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세진이, 재호 말고도 많은 학생들의 희생으로 전방입소가 철폐됐어. 하지만 요즘도 전동록씨 사건이나 의정부 여중생 사건 보면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는지 울분을 느껴요. 사과는 당연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녀. 김대중 정권도 지탄받아 마땅해. 아들비리도 그렇지만 여중생, 전동록씨 사건 있는데 그렇게 있어서 되겠어.”
김재훈씨는 “이게 제대로 된 주권국가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의 죽음 이후 김씨는 개인사업을 접고 ‘한겨레사회연구소‘를 차려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87년부터 <자유언론>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또 1988년에는 한겨레민주당 창당작업에 함께 하기도 했고 범민련 남측본부 감사, 민주주의민족통일서울연합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어머니 김순정씨도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으로 활동하며 아들의 뒤를 이었다.

1999년말 대장암 수술을 받고 요양겸 해서 현재 화성군 정남면에 살고 있는 아버지 김재훈씨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전했다.
“나도 민주노동당 찍었지만 8%에 고무돼 있어선 안돼. 노동자들이 얼마야. 노동자들이라면 다 찍어야되는 것 아냐.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어.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뢰를 얻어야 해. 당원교육도 철저하게 하고.”
[ 95호] 7.8 ~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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