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에서 살아 남기 위해

월드컵의 함성 뒤안에 두 아이의 죽음이 묻혀 있다. 친구 생일집에 가던 중학교 2학년 미선이과 효순이가 미군의 50톤짜리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3, 4위전이 있던 날 3년 뒤 다시 터진 서해교전에서 우리 군인들이 전사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난데없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내 땅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생떼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 심정은 또 오죽하랴.

2만2천 볼트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를 절단하고 고통스러워하다 죽은 전동록 씨 장례 사흘만에, 같은 부대인 미 2사단이 또 아이들을 죽였다. 미군은 가해 당사자인 그들의 자체 조사만으로 진상을 덮고 모르쇠와 말 바꾸기로 일관하고 있다.

2년 전 오끼나와에서 미군이 초등학생을 성폭행했을 때에는 대통령 클린턴까지 사과하지 않았던가. 미군이 앉아 있는 SOFA와 우리가 서 있는 송곳 자리는 너무도 불평등하다.

서해교전이 터지자 이 땅은 붉은 악마의 물결에서 순식간에 백색 파도로 바뀌었다. 언론과 정치권은 연일 ‘남북 대화 중단, 햇볕 정책 폐기, 확전 각오’ 등등의 섬뜩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정략적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국민의 생존을 놓고 함부로 막말을 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작은 불씨 하나가 잘못 튀어도 한반도 전체가 불탈 수 있는 처지에 살고 있다. 6월이면 연평 바다에는 꽃게잡이 전쟁이 벌어진다. 남쪽은 생계를 위해, 북쪽은 달러를 벌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툭하면 월선을 한다고 한다.

이 바다에는 쌍방이 합의한 휴전선이 없다. 이승만 정권의 도발을 막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임의로 설정한 북방한계선이 불안하게 그어져 있을 뿐이다. 우발적 충돌이 상존하고 있다.

연평도 북방한계선 20~30㎞ 앞 황해도 해안에는 엄청난 해안포와 미사일이 있고, 불과 5분 거리에 전투비행단이 있다 한다. 남쪽 역시 마찬가지로 최신예 장비로 무장되어 있다.

까딱 냉정을 잃으면 불씨가 화약고에 옮겨붙는 것은 순간이다.
한국전쟁으로 3백만 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 현재 남북의 전력은 그 당시에 비해 50배가 넘는다.

현대전에서는 전후방도 없다. 당연히 피난갈 곳도 없다. 응징과 확전을 말하는 이들은 한반도에 전쟁이 나도 괜찮을까? 수시로 외국에 드나들고,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고, 분만도 외국에서 하는 사람들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 교사는 아이들끼리 다투었을 때 한쪽 아이의 말만 듣고 판단하거나 편들지 않는다.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다툼의 소지를 없애주고, 싸운 녀석들이 이를 계기로 더 친해질 수 있도록 다독거려준다. 불행한 사고에서 더 큰 교훈을 얻는 법이다. 언제 어떤 우발적 다툼이 전쟁을 부를지 모를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찌할까.

증오와 대결을 선동할 게 아니라, 6·15 공동선언 뒤 중단된 대화를 통해 이번에 다시 확인한 전쟁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 화해와 평화 통일로 가는 디딤돌을 놓아야 할 일이다.

북한은 한국의 월드컵 경기를 녹화중계하면서 ‘남조선’의 4강 진출은 아시아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민족의 자랑’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4강 진출 뒤에는 축하전문까지 보냈다. 이런 이들이 이중 행동을 했을까. 대체 ‘의도적 도발’이 북쪽에 무슨 도움이 될까.

올 초에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발표했다. 핵태세 보고서에서는 핵 선제 공격 대상국으로 북한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은 경제 봉쇄를 풀기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기대하고 있다. 하필 월드컵으로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된 때를 잡아서 스스로 ‘악의 축’임을 선전하려 했는가. 그렇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올 들어 남쪽 땅에는 반미 감정 일고 있다. ‘악의 축’ 발언, 동계 올림픽 판정 시비, 차세대 전투기 선정 의혹, 월드컵 한미전, 전동록씨 사건과 이어진 여중생 압사 사고로 결코 미국에 호의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 남쪽은 대선을 앞두고 있고, 미국은 MD체제 구축과 대화라는 냉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왜 불현듯 통킹만 사건이 떠오를까. 1964년 미국은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 구축함을 공격했다며, 대통령에게 전쟁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시키고, 다음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그 뒤 비밀 해제된 ‘국방성 비밀문서’에서 이 사건은 치밀하게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애국주의’는 아프칸을 넘어,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라크와 그리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민족의 생존은 어찌될 것인가.

신연식 전교조 통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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