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월드컵 폭풍'이 지나간 자리

'월드컵 폭풍'이 지나간 자리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폭풍처럼 월드컵은 끝났지만 그 흔적은 너무나 넓고 깊게 남아 무엇으로 그 빈 공간을 채워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축구 이야기를 하고 히딩크 감독을 화제에 올리며 붉은 악마에 대해, 'Be the Reds'에 대해, 홍명보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광장을 메웠던 붉은 색의 함성이 환영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정말 모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가질 수 있었던 행복감, 그 감동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여운을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월드컵 폭풍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그 폭풍은 너무 컸고 너무 깊게 흔적을 남겼다.

'붉은 함성'을 보는 이런저런 시각
그 폭풍을 일으킨 핵심동력은 물론 한국 축구대표팀의 놀라운 선전이었다. 하지만 정작 폭풍의 정체는 연인원 2천1백93만명이 참여한 길거리응원, 그 붉은 함성이 내보인 엄청난 에너지 그것이었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감동한 것도 한국축구도 축구지만 그보다는 한국 '축구팬'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열정과 놀라운 절제력은, 월드컵 개막 전까지도 존재하지 않다가 월드컵 기간 동안 비로소 강력하게 형성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월드컵이 끝날 무렵에는 아예 월드컵 전체를 점령하다시피 해버린 한국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이번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한국민'이라는 어느 외신의 보도는 그런 의미에서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월드컵이 지난 뒤끝에서 '붉은악마 현상'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과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맹목적 국가주의의 광기'를 읽고 있고, 어떤 이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의 한 바탕 축제'를 찾아낸다. 누구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절제된 응원문화'를 찬양하고, 또 누구는 '잠재적인 일탈욕구가 권력에 의해 허용된 공간 안에 머물러 버리는 순응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붉은 악마 현상에서 '새로운 문화의 코드'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억압된 욕구의 일시적 해방'말고는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름대로 의미 있고, 또 근거도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이 거대한 에너지를 그저 어느 한 쪽의 시각으로만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에너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거기에는 다양한 시각이 제시하는 모든 속성들이 나름의 비중으로 함께 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상을 보는 시각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또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인권단체가 당한 '이지메'를 보니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그러니까 한국대표팀이 16강을 넘어 8강, 4강까지 거침없이 나아가는 동안 월드컵 때문에 가려진 그늘을 지적하거나 월드컵의 열광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이 국제적인 미디어 이벤트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일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심지어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나는 월드컵에 관심 없다'는 지극히 정당한 개인적 감상조차도 표현하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어느 신문을 보아도 칼럼이든 사설이든 월드컵과 한국축구, 붉은악마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글 일색이었을 뿐 조금이나마 삐딱한 시선은 찾기 어려웠다. 급기야 한 인권단체가 다소 격한 어조로 월드컵 열기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놓았을 때 벌어진 현상은, 붉은악마의 '휴지를 줍는 성숙한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사회에 자신과 상반된 의견을 관용하는, 진정 민주적인 사회의식이 뿌리내리기에는 멀고 먼 일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했다.

나는 붉은 인파의 엄청난 함성을 그저 국가주의의 잣대로만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그들의 함성이 미디어와 국가,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호출되고 조직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축구를 중심으로 모인 그들의 열광에서 또 다른 집단주의를 느끼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급작스런 월드컵 4강이 곧 모든 부문의 그만한 발전과 성숙을 약속하는 것이 아님은 그래서도 분명한 것 같다.

성공회대교수·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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