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안의 영화이야기④]존 리드, 그리고 "Be The Reds"

이지안 mulu@kdlpnews.org
모스크바의 어느 잠 못 이루는 밤, 우연히 틀어본 텔레비젼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발견’한 적이 있다.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장면만을 편집한 다큐멘타리였는데, 그때 내가 텔레비젼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워런비티가 거기 있었다는 것. 게다가 그 워런비티는 그냥 워런비티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적 빨갱이, 존 리드였다.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에 배우, 감독, 그리고 제작자까지 몽땅 도맡은 영화 로 아카데미상 12개부분 후보로 지명된 워런비티는 후줄근한 양복에 수염도 제멋대로 뻗친 몰골로 심드렁하게 앉아있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헨리폰다의 유작이 된 어떤 영화에 밀려 는 줄줄이 탈락하고 있었다. 아카데미가 별 수 있나, 빨갱이 영화에 상을 줄 리 만무하지.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사회자는 빨갱이를 불렀다. 감독상 !

“잊혀진 미국의 한 공산주의자 혁명가의 일대기를 만드는 데 들어간 엄청난 자금을 조달해준 미국의 자본주의에 감사한다.” 단상 위로 터벅터벅 올라간 워런비티가 내뱉은 말은 시니컬한 그의 표정과 함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아마도 나는 존 리드가 살아있다면 그와 똑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Reds라는 말에 내 정체성을 묶어두었고, Reds라는 말의 울림은 나를 사로잡았다. 한국말 ‘빨갱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적어도 그 시간 동안 Reds라는 말을 한번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월드컵이 시작되던 즈음, 거리에 나갈 때마다 온통 사람들의 가슴에 출렁이는 익숙한 구호의 물결로 잠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Be The Reds였다. Be The Reds, 빨갱이가 되자고?

한순간 ‘붉은악마’에게 불쾌했다. Reds라는 말을 고작 국가대표 서포터즈들에게 빼앗기다니. 그러다가 ‘붉은악마’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붉은악마’ 때문에 빨갱이가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바보같이 우둔한 나는 그걸 몰랐던 거다.

저 가슴에 새겨진 Be The Reds가 말 그대로 빨갱이가 되라는 뜻이면 얼마나 좋을까. 월드컵 기간만큼 적어도 나는 저 티셔츠를 볼 때마다 온 국민이 빨갱이가 될 날을 생각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얼마 전 월드컵 평가 토론회가 열렸을 때, 패널로 나왔던 ‘붉은악마’ 미디어 팀장에게 Be The Reds에 혹시라도 중의적인 뜻이 담겨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 뜻이 빨갱이라는 걸 알고 있었느냐고.

그러나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울림’하고는 많이 다를테니까. 하지만 어디선가 저 티셔츠를 보며 존 리드의 빨갱이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리라.

오늘 밤 왠지 나는 붉은광장 어디쯤 있다던 존 리드의 묘지를 찾아가지 못한 게 그저 아쉬워진다. 그 사람이라면 내가 Be The Reds라는 구호에 울컥, 했던 이유를 알아줄 것만 같다.
[ 96호] 7.15 ~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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